[수능 출제 이대로는 안된다]<上>출제시스템부터 바꾸자
‘답’ 못찾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지난해 수능 세계지리 출제 오류에 이어 또다시 올해 수능 영어 출제 오류로 진퇴양난에 빠진 서울 중구 정동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평가원은 내부적으로 복수 정답을 인정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허겁지겁 출제에 검토까지 부실
‘단기간 내 합숙 출제’ 시스템은 부실 출제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올 수능도 10월부터 한 달 동안 교수와 교사 등 수능 출제위원 316명이 모처에서 합숙을 하며 출제 작업에 들어갔다. 수능을 약 한 달 남기고 문제를 만들기 시작한 것. 출제위원들은 이 기간에 교과 과정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EBS 교재와 문항 연계율 70%를 유지하며 문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마치면 시중 참고서와 문제집, 학원 교재를 다시 살피며 혹시 유사한 문항이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까지 거쳐야 한다.
출제뿐만 아니라 시험 이후 검토 과정도 숨 막히게 진행된다. 시험문제가 수험생과 언론에 공개되고 오류 의혹이 제기되면 평가원은 이를 모아 전문가 검토, 학회 자문 등을 거쳐 최종 정답을 확정해야 한다. 평가원 관계자는 “이후 성적 산출과 성적표 배부, 각 대학 정시 전형이 줄줄이 잡혀 있기 때문에 사실상 열흘 내에 검토와 확정을 끝내야 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평가원도 기관인 이상 오류를 인정할 경우 기관장 사퇴 등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런 부분도 끝까지 오류를 인정하지 않게 만드는 한 가지 이유다. 지난해 수능 세계지리 문제의 경우 1년이나 지나 오류를 인정하는 바람에 더 큰 혼란을 빚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수능과 대입 전형 기간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수능, 성적 산출, 오류 검토, 대입 전형 등 각 단계 사이에 충분한 시일을 주자는 것. 임성호 하늘교육 대표는 “현실적으로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검토와 오류 수정이 힘들다”며 “대학 입학 일정을 미루긴 어렵기 때문에 현재보다 수능을 한두 달 앞당기는 등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능 검토위원으로 참여했던 한 고교 교사는 “교수들이 고교생들의 지적 수준이나 학습 정도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번 생명과학Ⅱ 문항에 대해서도 학교와 학원가에서는 “꼬아도 너무 심하게 꼬았다”는 평이 나온다. 서울의 한 학원 강사는 “올해 생명과학Ⅱ 문제를 제한시간(30분) 내 제대로 풀기란 학원 강사들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생명과학Ⅱ 과목은 만점자가 속출할 정도로 쉽게 출제됐다. 그 때문에 이번 출제에 참여한 교수들이 지난해보다 어렵게 출제해야 한다는 압박감만 가지고 수험생 실력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문제를 냈다는 지적이다. 수능 난이도를 조정하기 위해 매년 6, 9월 수능모의평가를 실시하지만 막상 교수들은 이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제 교수들이 검토 교사의 지적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문제다. 수학처럼 풀이와 답이 명확한 경우에는 교수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과학이나 영어처럼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검토위원인 교사의 의견이 묵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 교수와 교사라는 신분 차이로 교사가 지적을 할 경우 출제 교수들이 매우 불쾌해하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문항 출제와 검토가 평등하게 이뤄지도록 인적 구성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교수 출제-교사 검토’ 식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제대로 된 검증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출제와 검토 모두 교수와 교사를 반씩 구성한다든지, 검토 작업은 아예 평가원이 아닌 제2의 독립기관이나 외부 교육 관련 기관이 맡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은택 nabi@donga.com·전주영·임현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