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논설위원
매년 11월 둘째 주 목요일에 치러지는 수능 날이면 나라 전체가 초긴장 모드에 들어간다. 출근시간이 늦춰지고, 증시는 늦게 개장하며, 경찰의 임무는 수험생 ‘배달’이 된다. 수능 영어 듣기평가가 진행될 때 비행기들은 착륙을 못 하고 공항 주변을 선회한다. 이를 두고 지난해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대학입시 때문에 한국이 멈춰 섰다”며 한국 수험생은 이 시험의 성패에 따라 경력과 결혼 전망까지 결정짓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외국인에게 수능 풍경이 이상하게 비치거나 말거나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일생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 수능이 출제 오류, 난이도 조정 및 변별력 확보 실패로 시험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부는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문제 오류에 대한 판결을 수용하고 관련자 전원을 구제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약속을 한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아 2015학년도 생명과학Ⅱ와 영어에서 복수정답이 나왔다. 이번에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출제 오류를 빠르게 인정해 지난해처럼 등급과 당락이 바뀌는 사태는 없지만 시험의 신뢰도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가 이 잘못된 정책을 폐기하지 않은 게 패착이다. 수능 문제를 EBS 교재에서 출제하는 것은 박 정부의 ‘창의인성 교육’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창조경제를 뒷받침할 창조형 인간을 육성한다면서 EBS 교재를 달달 외워 시험을 치르게 하는 건 난센스다. 교육당국이 이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면 더욱 한심한 일이다.
그러나 출제 오류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수능 문제 하나 맞혔느냐, 틀렸느냐에 따라 등급이 달라지고 대학 당락이 결정되는 입시제도다. 특히 정시에서는 당일 컨디션이 나쁘거나, 실수할 경우 초중고교 12년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다. 사교육을 잡느라 최근 수능은 ‘쉬운 수능’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실력이 아니라 ‘실수 안 하기’를 테스트하는 시험은 이미 시험이 아니다.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을 본떠 만든 수능은 학력고사와는 달리 학생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 SAT의 본질은 놓치고 이름만 빌려왔다. 미국 대학들은 등급이 아니라 SAT 점수를 반영한다. 그러면서도 점수는 참고만 한다. 우리는 문제 하나 ‘맞고 틀리고’에 따라 등급이 달라지고 등급이 달라지면 당락도 영향을 받는다. 이런 기괴한 수능 체계를 계속할지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져야 할 때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