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영 소비자경제부 기자
가방은 열려 있었다. 책들은 그대로 있었지만, 노트북만 없었다. 지하철은 이미 떠난 뒤. 수만 장의 사진과 자료도 노트북과 함께 사라졌다. 지하철 선반 위에 노트북 가방을 올려놓고, 휴대전화에 고개를 푹 박고 있던 내 잘못이었다.
분실이든 도난이든 일단 파출소로 향했다. 경찰은 “도난이라면 노트북이 인터넷 중고 게시판에 매물로 나올 수 있으니 틈틈이 살펴보라”고 했다. 또 습득한 물건을 게시하는 경찰청과 지하철의 홈페이지 주소를 메모지에 또박또박 써서 건네줬다.
노트북 찾는 것을 거의 포기할 무렵, 지하철 분실물 센터 홈페이지를 살펴보다가 잃어버린 노트북과 비슷한 제품의 사진을 발견했다. 전화로 확인하니 내 노트북이 맞았다.
노트북이 발견된 곳은 회사와 반대 방향의 종착역이었다. 지하철은 서울을 관통해 경기도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로 진입해 종착역에 이른 것이었다. 승객이 모두 내린 뒤 객실을 점검하던 직원이 노트북을 발견했다. 지하철이 왕복 150km를 오가는 동안 수백 명의 승객이 노트북을 봤겠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고마운 마음으로 빵을 사들고 한달음에 종착역에 가니 역무원들은 “물건을 되찾아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실제로 해외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대한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미국의 월간지인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50달러가 든 지갑 200개를 유럽 전역에 뿌렸는데 이 중 58%가 회수됐다. 특히 소득 수준이 높은 북유럽에서는 회수율이 70% 이상이나 됐다. 이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힘이었다. 사회적 자본이란 사회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공동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제도나 규범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사회적 자본의 핵심은 신뢰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정해진 규칙을 잘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다. 사회적 자본이 잘 확충된 국가일수록 각종 사회적 비용이 적고 경쟁력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김유영 소비자경제부 기자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