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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허진석]식민 지배를 못 벗어났다면

입력 | 2014-11-28 03:00:00


허진석 채널A 차장

“여자들은 성폭행을 당한 뒤 죽임을 당하고 남자들은 고통스러운 고문 뒤에 죽게 될 것이다. 자살을 하는 것이 더 낫다.”

군인들은 이렇게 말하며 주민들에게 폭탄을 나눠줬다. 선택이 가능한 제안이 아니었다. 가족끼리 파편에 잘 맞을 수 있도록 원을 그리며 둘러선 뒤 폭탄을 터뜨렸다. 불발하면 가장이 부모와 아내, 어린 자식들을 직접 죽이고 자결을 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들이 숨어 있던 토굴 주변에선 면도칼 같은 도구들이 유난히 많이 나왔다. 군인들은 현지 주민들이 사로잡히면 자신들의 동향이 새어 나갈까 봐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

군인들은 또 주민들이 가진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 말라리아가 창궐하던 산으로 사람들을 내쫓았다. 그 바람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태평양 전쟁 중 있었던 오키나와(沖繩) 전투에서 일본군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이런 고통을 안겼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의 상륙과 함께 3개월간 지속된 전투에서 20여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 중 절반에 가까운 9만4000여 명이 섬 주민이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산호초로 유명한 오키나와가 품은 아픈 역사다. 원래는 류큐(琉球) 왕국으로 독립국이었다가 1879년 일본에 복속돼 오키나와 현이 됐다. 오키나와 전투 이후 미 군정의 통치를 받다가 1972년에야 다시 일본의 행정권 아래에 놓였다.

원래 고유의 언어(류큐어)를 사용했지만 1940년대부터는 사용이 금지됐다. 일제가 조선어 말살 정책을 편 것과 같은 이유인 일왕의 국민으로 만든다는 황민화 정책에 따른 것이다.

채널A 개국 3주년 기획 취재를 위해 찾은 오키나와에서 전투 당시의 참상을 들려준 노인을 포함해 그곳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을 집단 강제자결의 길로 내몰았던 그 군인들과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식민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한반도에서도 이런 모습이 연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공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오키나와의 이런 역사는 이곳 사람들에게 평화에 대한 염원을 키웠다. ‘군인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불안감도 그들의 가슴엔 남아 있다. 일본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 경향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후텐마(普天間) 미군 기지를 오키나와 북부의 헤노코(邊野古) 해안으로 이전하는 데 그토록 반대가 많은 것은 일본에 복속된 이후 차별을 받으며 이용만 당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오키나와 현 다케토미(竹富) 정 교육위원회가 자위대에 대한 긍정적인 서술을 문제 삼아 올봄 기존 교과서 채택지구에서 독립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12월 1일과 2일 이틀에 걸쳐 채널A 종합뉴스 시간에 방영될 개국 3주년 기획 리포트는 이런 맥락하에 있는 ‘오키나와의 저항’을 다룬다.

오키나와 사람의 일본 본토에 대한 거리감은 현지 택시 운전사와 나눈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어디서 왔는지를 묻기에 알아맞혀 보라고 했더니 “차이나(중국)?” “타이완(대만)?”이라고 한 뒤 “저팬(일본)?”이라고 물었다.

허진석 채널A 차장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