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세계지리 8번 복수정답 소송 이끈 박대훈 전 EBS강사
《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수학능력시험 오류 논란이 불거졌다. 교육부와 문제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지난달 25일 영어 25번 문항과 생명과학Ⅱ 8번 문항을 복수정답 처리하기로 했다. 눈길을 끄는 점은 평가원의 재빠른 대응이었다. 김성훈 평가원장은 책임을 지겠다며 자진 사퇴했다. 이런 신속 대응에는 11개월 동안의 소송에서 평가원이 패소한 ‘2014년도 수능시험 세계지리 8번 문제’ 트라우마가 있다고 볼 수 있다. 2014년도 문제가 법원에서 승소하게 된 과정의 한가운데 박대훈 전 EBS 강사(현 학원 강사)가 있다. 그는 수험생 59명과 함께 교육부와 평가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패소했지만 22명의 수험생과 함께 항소심을 진행해 결국 올해 10월 승소 판결을 받았다. 1994년 시작된 수능 역사상 오류를 인정받은 적도 처음이고 소송까지 이긴 것도 처음이었다. 다시 오류 논란이 불거진 지금, 과연 현재의 수능 시스템은 이대로 좋은 건지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 그를 만나 보았다. 》
지난달 28일 서울 동작구 자택에서 만난 박대훈 전 EBS 강사. 그는 “EBS에 대한 수능 의존이 심해지면서 EBS가 사교육 업체를 흉내 내고 있다”고 꼬집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평가원의 오류가 작년, 올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2년 9월 모의고사 때의 일이었다. 당시에도 세계지리 과목에서 지문 오류가 있었다. 미국의 인구센서스를 제시하면서 ‘흑인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지문이 나왔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흑인 인구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히스패닉 이민자가 많아지면서 소수인종 중에서 흑인 비중이 적어지고 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2013년도 세계지리 8번 오류를 처음 제기한 학생이 그때 내 강의 동영상을 보고 도움을 요청했으니 말이 씨가 되어 이렇게 커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13년도 문제는 지역경제협력체에 대한 옳은 설명만 고르도록 한 문항에서 ‘유럽연합(EU)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보다 총생산액 규모가 크다’는 지문이 문제였다. 지도에는 2012년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2010년부터 NAFTA의 규모가 EU를 추월했기 때문에 틀린 것이었다. 박 강사는 평가원에 항의했지만 역시 평가원은 오류를 인정하지 않았다.
“최근 2, 3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전에도 수능이 끝나면 보통 700건이 넘는 이의 제기가 평가원 게시판에 올라왔다. 오류가 최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오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평가원의 태도였다. 매번 수험생들의 지적을 무시하고 넘어가는 게 관행처럼 되었다가 결국 법정 싸움까지 가게 된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교사나 강사들에 대한 평가원의 압박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어 “평가원에서 문제를 출제하는 교수 교사 학원 강사들이 서로 학연으로 얽힌 경우가 많고 나 역시 아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 소송할 때 고민됐던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EBS 70% 연계’로 찬밥 된 교과서
서울대 지리교육과를 졸업한 박 강사는 중학교에서 지리 교사로 일하다 교육방송(EBS) 공채에 합격해 6년 반 동안 한국지리, 세계지리, 경제지리를 강의했다.
그는 현 수능의 문제점과 관련해 EBS 영향력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도 문제라고 했다. “원래 노무현 정권 때 시작된 ‘EBS 문제-수능 연계’는 사교육을 없애자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됐다. 과외를 받기 어려운 수험생들이 EBS 강의를 듣고 EBS 문제만 봐도 수능을 공부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것이다. 문제는 이명박 정권 때 이 비율이 70%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수능 문제 중 상당수가 EBS 문제집을 약간 바꿔 나간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수험생들이 EBS교재에만 매달리기 시작했다.”
“고3이 끝나면 아이들이 책을 버리는데 교과서들이 너무 깨끗하다. 요즘 교과서들은 종이의 질도 좋고 만드는 사람들도 공을 들여서 저렴한 가격에 파는데 이 교과서들을 정작 아이들이 외면하고 있는 거다. 수험생들은 EBS 교재에 나온 문제와 지문이 그대로 나오니까 원리와 원칙을 가르치는 교과서보다 EBS 교재를 달달 외워 공부하는 걸 원한다. 이러다 보니 현장 교사들도 불만이 많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사교육시장의 최대 수혜자는 EBS가 되어버렸다. 2012년 결산자료에 따르면 EBS는 교재 수입으로 그해 한 해에만 무려 1126억 원의 매출을 거뒀다. 박 강사는 “상당수 수험생들 입장에서는 ‘EBS 문제집만 달달 외우면 최소 60% 이상은 맞힐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유혹”이라고 말했다.
수능 장점 사라지고 학력고사 회귀
그는 “의존도 의존이지만 지금 EBS 교재에서 가르치는 문제들이 변하는 시대 상황을 대변하지 못해 공교육을 1994년 이전으로 되돌리고 있다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수능은 말 그대로 수학(修學)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수능 문제들은 대부분 암기형이다. 이런 문제들을 내놓고 ‘수능’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 1994년 수능이 도입됐던 목적은 학력고사 세대가 암기 위주였기 때문에 미래 인재 개발에 맞지 않다는 목소리가 컸기 때문이었다. 초기 수능은 이런 목소리를 제법 많이 반영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여러 정보를 해석해 답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측정하는 데 나름대로 많은 할애를 했다.”
이 대목에서 그가 기자에게 갑자기 한반도 지도가 그려져 있는 문제 하나를 주더니 풀어 보라고 했다. 지도는 주요 광물 자원의 분포를 나타낸 것이었는데 A부터 D까지 표시된 자원에 대한 옳은 설명을 ‘보기’에서 고르라는 문제였다. 광물과 분포 지역, 특성을 달달 외워야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이런 문제를 낼 때 초반기 수능 문제는 최소한 자원 생산량과 자원 고갈 시기를 그래프로 제시한 뒤 어떤 실천 방안이나 정부 정책을 써야 될지 추론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단기간 벼락치기가 아닌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에게 유리하다는 말이 이 때문에 나왔었다. 어느 순간 이게 단순 암기 형태로 바뀌면서 요즘 수험생들은 옛날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무조건 암기를 선호한다. 차근차근 근본 원리를 파악하는 공부는 시간 낭비라며 외면한다.”
그는 “1994∼2004년에 나온 수능 문제가 가장 좋았다는 의견이 많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출제위원들도 고심해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냈고, 전국 교사와 학원 강사들은 그 새로운 ‘사인’을 읽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다. 수능 문제가 교육의 방향을 제시해준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출제위원들의 재량권도 많지 않은 편인 데다 이미 완제품인 EBS 교재를 갖고 내는 상황이다. EBS 교재들도 몇몇 교수와 교사가 만든 만큼 오류가 있을 수 있는데 말이다. 참고서 중 하나일 때는 상관없지만, 이것이 교과서를 능가하는 ‘절대 선’이 될 경우 부작용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금 교육현장에서 EBS 수능 연계율 70%를 30% 선으로 낮추자는 의견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출제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 달 합숙으로 교수와 교사들이 모여서 문제를 만드는데, 특히 장유유서 분위기가 강한 교육계 분위기상 선배들이 만든 문제에 아랫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교사가 한 달씩 학교에 안 나오고 문제 만들러 들어가는 것을 선뜻 허락해줄 교장도 많지 않다.”
달동네 출신으로 학창시절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서울대를 갔다는 박 강사는 인터뷰 말미에 “지금 한국 사회에서 나 같은 경우가 가능할까”라고 물은 뒤 이렇게 말을 맺었다.
“정말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하는 교육정책을 펼 의지가 있다면 EBS 수능 연계가 아니라 학교수업도 따라가지 못하는 학업 포기자 아이들을 위한 교육정책이 나와야 한다. 공부를 접은 아이들이 다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 말이다.”
그의 말을 들으며 선의로 시작한 정책들이 악으로 끝나는 제도들의 또 하나의 사례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 : 박대훈 강사 : :
▽서울대 지리교육과 졸업
▽전 EBS 수능방송 사회탐구영역 출연 강사(2006∼2011년)
인터뷰=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 이 기사 취재에는 도혜민 인턴기자(경북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