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세상을 바꿉니다/잊지 못할 말 한마디]보조국사 지눌의 법어
이금림 (드라마 작가·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뜻하지 않게 드라마 작가가 된 뒤에도 좋은 운은 계속되었다. 전직이 교사였다는 이점으로 ‘개구쟁이 철이’ ‘억척선생 분투기 ‘호랑이 선생님’ ‘고교생 일기’ 같은 어린이, 청소년 드라마를 연속으로 쓸 수 있었다. 그 뒤 ‘물보라’ ‘뜨거운 강’ ‘빛과 그림자’ 같은 성인물로 옮겨갔는데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목욕탕에서 전날 밤 방영된 내 드라마의 내용에 화내고 슬퍼하고 흥분하는 시청자들을 보면서 ‘아, 나는 드라마 작가가 천직이구나, 진즉 드라마 작가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참담한 실패에 직면하기 전까지 나는 드라마 작가로서의 내 재능을 의심치 않았다.
1980년 중반에 방영된 ‘타인’이라는 드라마 첫 연습 때 고 김순철 선생님이 “이 선생, 이거 이거 예감이 좋은데. 대박 나겠어”라는 기분 좋은 덕담까지 해 주셨다. 하지만 5회째부터 뭔가 뜻대로 안 됐다. 간신히 6회를 써 보낸 뒤 7회부터 아예 쓸 얘기가 없었다. 50회 주말 연속극에서 초반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한 신도 건지지 못한 채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날이 계속되었다. 원고를 대지 못하면 방송 펑크였다. 잠시 어렵게 눈을 붙이면 어김없이 배우와 스태프가 원고가 없어 녹화를 못하는 악몽을 꾸었다.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시간 내에 원고를 보내야 하는 강박감은 입속에 침을 마르게 했고, 심장이 오그라들어 숨을 쉴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재주 없음에 절망하고 절망했다.
그 무렵 ‘땅에서 넘어진 자 그 땅을 딛고 일어서라’라고 적힌 엽서 한 장을 받았다. 친구인, 지금은 고인이 된 ‘혼불’의 소설가 최명희가 보내준 엽서였다. 한참 동안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으로 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드라마에서 도망치려 애쓰고 있던 나에게 ‘이대로 도망치는 건 비겁하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라’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나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대부분의 작품은 ‘타인’ 이후에 나온 것이다. 아직도 나는 작품을 쓰는 동안 절망한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은 충동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보조국사 지눌의 법어를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른다. ‘땅에서 넘어진 자 그 땅을 딛고 일어서라.’
이금림 (드라마 작가·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