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녀 시인·국제 펜 이사 여성문학인회 부회장
내 아버지도 그중 한 사람이다. 아버지의 망향은 참으로 끈질겼다. 악센트가 강한 함경도 사투리를 쓰신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전에 음식도 북쪽이 원조인 평양냉면이나 함경도 식해를 만들게 하여 드셨다. 만나는 사람 또한 6·25 때 피란 온 실향민이 대부분이었다. 즐겨 흥얼거리는 노래조차 ‘신고산 타령’ 같은 것이었으니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명절마다 온 가족이 판문점에 가서 기일(忌日) 없는 제를 올리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명절 아닌 때도 눈이 오는 날엔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비가 오는 날엔 후줄근하게 비를 맞으며 그곳에 다녀오시던 대표적인 실향민이다. 모든 아버지가, 아니, 모든 북쪽 출신이 그곳에 가서 뿌린 한숨이나 눈물을 생각하면 하늘도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한숨과 눈물로 화살촉이라도 만들었다면 하늘로 날아올라 뚫지 못할 벽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싶다.
아버지 당신이 자진 입대한 이유가 북에 계신 어머니를 모셔 오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빗발치는 총알도 무섭지 않았기에 전선을 요리조리 피해 집에 도착했던 그 새벽녘, 아버지가 목숨 걸고 찾아간 집에는 키가 자란 개복숭아 나무만 빈집을 지키고 있었단다. 그때 할머니는 손자며느리의 해산을 도우러 며느리 친정에 가셨다고 한다. 속이 쓰린 영화의 한 장면이다.
“아버지, 그 개복숭아 나무는 누가 심었나요?”
언제나 아버지는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얼굴에 희색이 가득한 채로 이렇게 말했다.
“그 개복숭아 나무 말이냐? 너도 생각나지?”
“원산에서 데려온 대목이 집을 지었지, 그 동네에서 제일 잘 지은 집이었는데.”
못 살고 나오셨다는 한탄이리라.
“어머니가 과수원에 있던 그 나무를, 집을 지은 기념으로 옮겨 심어 주셨지. 그 개복숭아, 아, 정말 맛있었다. 두 손으로 이렇게 힘을 살짝만 주어도 씨가 보이게 짝 쪼개지지, 남쪽에서는 그런 복숭아를 본 일이 없어.”
실제로 두 손을 마주 잡으시고, “그런데 네가 그걸 기억하다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라는 듯, 흐뭇하게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다. 아버지와 나는 장단이 잘 맞았다.
그 개복숭아 나무, 새로 지은 기와집의 기둥, 뜰 앞의 모란이나 무너질 듯한 초가집에서 돗자리를 깔고 살던 내 친구 순덕, ‘김일성 장군 노래’를 부르며 한 줄로 서서 걸어가던 등굣길, 팔에 빨간 두 줄을 차고 다닌 기억, 외갓집으로 가는 한 재 넘이의 오솔길을 걸어갈 때, 팔메지라고 부르는 아까시나무 시퍼런 벌레가 머리에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던 기억, 그런 것들은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 내 뇌리에 원판으로 인화되어 있었다. 어느새 나는 아버지가 그리워하는 고향의 그 모두를 전수받은 셈이다.
“너는 어렸을 땐데” 하시며 계속되었던 아버지의 북쪽 생활 회고는, 매번 자신의 모든 희망과 삶의 가치를 그곳에 걸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할 정도로 희미했던 그 개복숭아 나무가 아버지와의 대화에 좋은 촉매제가 될 줄은 몰랐다. 그 개복숭아 나무를 분가 기념으로 심었다는 북쪽 땅은 아버지의 어머니가 계신 곳이고, 그 개복숭아 나무를 할머니가 기념으로 심어 주었다는 것, 진사를 지낸 할아버지의 막내아들로 내 아버지가 태어났고, 여우도 죽을 때에는 태어난 쪽으로 머리를 두듯이 어떤 일이 있어도 조상 곁에 묻혀야 한다는 것, 임종을 못한 아들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 등을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배웠다.
간혹 정신을 놓으시던 말년이었다. 아버지를 뵈러 고기 몇 근 사 가지고 친정에 가서 수십 번도 더 써먹은 레퍼토리로 끊어지는 아버지의 정신줄을 이어 보려고 “아버지, 그 개복숭아를 누가 심었다 했지요?” 했을 때 “아니 너 지금 내게 뭐라고 했니?” 잔뜩 얼굴을 찡그리시며 “내가 평생 동안 몇십 번 얘길 했는데 아직도 그걸 모른단 말이야?” 냅다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조금도 헷갈리지 않으신 아버지는 엄하게 나를 나무랐다. 그 개복숭아 나무 이야긴 아버지가 들어도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주제였고, 그것을 기억하는 내가 밉지 않아, 진짜로 화가 나진 않았을 거라고, 나 편한 대로 해석했지만, 살짝 정신이 돌아와 나를 걱정하시던 아버지가 오늘 더욱 그립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공원묘지에 홀로 누워 계신 아버지를 찾는 날이면, 아버지 없이도 잘 돌아가는 이 세상이 원망스럽다. 떠들썩하게 들먹이던 남쪽과 북쪽의 이산가족의 아픔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이 세상 사람들의 망각을 때려 부수고 싶어진다. 그걸 잊어버린 누구에겐가 지독하게 저주를 퍼붓고 싶어진다.
어느새 내 가슴에도 망향이라는 불치의 지병이 통째로 들어와 자리를 잡아, 냉면도 평양냉면, 식해도 함경도 식해가 당기는 요즘, 가끔 판문각으로 가서 아버지가 하염없이 바라보시던 북쪽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통일이 되면 공원묘지의 아버지 유골부터 수습해 선산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하루라도 빨리 내 몸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
최금녀 시인·국제 펜 이사 여성문학인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