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교 해안에 표착(漂着)한 난파선 생존자를 위한 모금에서 한 구세군 여사관(女士官)의 아이디어로 자선냄비를 사용했던 것이 그 시초이다. …한국에서는 1928년에 시작돼 매년 실시되고 있다.’
여기까지는 저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아는 자선냄비의 유래죠. 그런데 며칠 전 가까운 구세군 사관과 통화하다 뜻밖의 사실을 듣게 됐습니다. 그분은 “구세군인 저도 잘 모르는 구세군 역사였는데 최근 알게 됐다”며 몇 가지 사실을 전하더군요.
이에 발끈한 세계구세군본부는 구세군이 아닌, 구세단의 자선냄비를 허용하지 않아 거리모금도 할 수 없게 된 거죠. 광복 이후 다시 명칭을 복원하고 세계본부를 설득한 1947년에야 자선냄비는 재개됐습니다. 1936년 전국적인 물난리 때 일제의 모금 승인이 나지 않았을 때조차 사령관이 각 구세군 교회에 개인모금을 요청해 어려운 이웃을 도왔던 구세군으로선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반면 6·25전쟁 와중에도 자선냄비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구세군 통계에 따르면 1950, 1951년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자선냄비 활동이 이루어져 당시 화폐 기준으로 50년 3000원, 51년 3421원을 모금해 피란민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52년에는 특이하게도 자선냄비가 ‘구세군자선鍋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거리에 등장했다고 하네요. 이 한자를 찾아보니 ‘솥 과’라고 돼 있으니, 그해만은 자선냄비가 ‘자선 솥’이 된 것 아닌가 합니다.
돌이켜보니 저도 길을 가다 문득 멈춰 자선냄비를 가리키며 아들의 고사리손을 빌려 작은 정성을 보태곤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쭈뼛하던 놈은 망설이다 슬금슬금 다녀온 뒤 수줍은 얼굴로 웃더군요. 이제 추억이 됐네요.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