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건 내 얘긴데…
직장인들 왜 ‘미생’에 열광할까
올해로 워킹맘 6년 차인 이모 과장(34)은 드라마 ‘미생’을 보다 선지영 차장의 대사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하는 선 차장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이 과장은 정확한 일처리와 똑 부러진 행동으로 입사 동기들 가운데 가장 빨리 진급했다. 하지만 여섯 살 난 아이 앞에만 서면 늘 미안하다. 최근 어린이집에서 “또래 아이들이 다치거나 자다 깨면 엄마를 찾는데 아드님은 ‘선생님’을 먼저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 가슴에 먹먹함이 가시질 않는다.
올해 상반기 공채로 국내 한 대기업에 입사한 손모 씨(28)는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보다 장백기에게 더 눈이 간다. 하루의 대부분을 복사기 앞에서 보내는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영상으로 그린 드라마 ‘미생’이 최근 직장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직장인들은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들을 보며 자기 자신을 본다. 미생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뭔가 부족하고 저마다 고민거리를 안고 있다. 같은 처지에 놓인 직장인들은 드라마를 보며 이들과 함께 울고 웃는다.
○ “맞아, 맞아! 저건 내 얘기야”
그야말로 ‘미생 열풍’이다. ‘미생’을 보지 않으면 직장 동료들과의 대화에 낄 수 없을 정도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4일까지 직장인 93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1.9%(762명)가 드라마 ‘미생’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 가운데 71.6%(546명)가 드라마와 실제 직장생활의 ‘싱크로율(비슷한 정도)’이 50% 이상이라고 답했다.
가장 많은 직장인(44%)이 본인과 가장 비슷한 인물로 계약직 신입사원 장그래를 꼽았다.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 장그래는 입단에 실패한 뒤 대기업 종합상사에 낙하산으로 들어온 ‘미운 오리 새끼’다. 남들 대부분이 가진 대학 졸업장이나 특출 난 스펙도 없다.
○ 직장인들의 슬픈 자화상, 오상식 차장
회사생활 15년 차인 황모 과장(40)은 미생의 오상식 과장과 같은 신념을 가졌다. ‘회사 내에서 정치하지 말자’는 것이 한결같은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런 신념 때문에 자신이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입사 동기들은 거의 모두가 차장 직급을 달았지만 아부할 줄 모르는 황 과장은 매번 진급 명단에서 제외됐다. ‘입바른’ 소리를 잘해서 상사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지만 일 처리만큼은 똑 부러져 온갖 일이 그에게 떨어진다. 입사 동기들이 “제발 눈치껏 행동하라”고 조언하지만 황 과장은 “회사에서 일만 열심히 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며 웃어넘긴다.
직장인들은 미생 속 에피소드 가운데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사내정치로 줄을 잘 서야 승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39.6%)에 가장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충혈된 눈이 풀릴 새도 없이 일이 몰려오는 것’(37.8%)도 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샀다. 직장 문화 서비스 기업인 오피스N 관계자는 “미생이 그린 것처럼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며 “직장인들은 드라마 속 장그래와 오 차장의 팀워크, 입사 동기들 간의 우애를 보면서 ‘그래도 불행하지는 않다’고 위로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