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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하정민]불통은 교황도 화나게 한다

입력 | 2014-12-10 03:00:00


하정민 국제부 기자

1527년 5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 로마를 침공했다. 그는 조부로부터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부친으로부터 네덜란드, 모친으로부터 스페인과 그 식민지라는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았다. 유럽과 남미 대륙을 다스리며 막강한 위세를 떨친 카를 5세와 중세를 지배하던 교황의 권력 다툼은 불가피했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키던 각국 용병들은 카를 5세의 대부대에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그러나 스위스 병사들로 구성된 근위대는 달랐다. 고작 189명으로 수천 명의 병력에 맞섰고 147명이 전사한 끝에 교황을 피신시켰다. 이 남다른 용맹과 충성심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도 스위스 근위대가 교황의 수호자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 스위스 근위대가 반갑지 않은 유명세를 치렀다. 지난주 프란치스코 교황은 2008년 8월 전임 베네딕토 16세가 발탁한 근위대장 다니엘 안리히 씨를 돌연 경질했다. 그가 ‘독재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대원들을 고압적으로 다룬 것이 문제였다. 스위스 경찰 출신인 그는 이주민 수감자에게 가혹행위를 한 전력 때문에 임명 당시부터 말이 많았다. 근위대장이 된 뒤에는 가뜩이나 호화로운 숙소를 비싼 돈을 들여 단장하는 등 부적절한 처신으로 구설에 올랐다. ‘빈자의 성자’로 불릴 정도로 권위를 싫어하고 약자를 보살피는 교황이 이런 근위대장을 어떻게 여겼을지 보나마나다.

안리히 씨를 제외한 역대 근위대장 33명의 평균 임기는 약 13.5년. 37년간 재직한 이도 있다. 반면 안리히 씨는 7년도 되지 않아 퇴진했다. 경질이 알려지자 한 근위대원은 “많은 대원이 그와의 접촉을 꺼렸다. 이제 독재는 끝났다”고 소감을 밝혔다. 조직원이 그를 어떤 리더로 여겼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번 사례는 정윤회 문건으로 혼탁한 한국 사회에도 많은 교훈을 준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비판이 끊이지 않던 인사 난맥, 비선 정치,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의 원인은 결국 리더의 불통(不通)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통을 지적받지 않은 지도자가 거의 없다 해도 현 정권의 불통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 문건이 찌라시냐 아니냐, 누가 문건을 작성하고 유출했느냐를 밝혀내는 것만으로는 이 사태를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분노를 막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통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를 혹세무민 조장, 국기 문란으로 몰아붙이는 청와대를 보면 그 불통이 ‘쌍방향 소통’으로 바뀔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까워 보인다.

국민은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1800여 년 전 왕조 시대에 등장했던 권력자 측근의 국정농단 의혹이 제기됐는지, 현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 남은 임기 3년간 이념 갈등, 민생, 복지, 통일 등 산적한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듣고 싶어 한다. 불통과 권위주의는 ‘신의 대리자’인 교황마저 노하게 하는데 인내심이 많지 않은 국민이야 어떻겠는가. 민주국가에서 변화에 둔감한 리더가 설 땅은 남아 있지 않다.

하정민 국제부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