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해 마라톤을 시작한 시각장애인 보험설계사 유장호 씨는 대회에 나가 풀코스를 완주하기도 했다. 기록은 7시간38분52초. 남들보다 배나 느린 기록이 그에겐 ‘포기를 모르는 사람’임을 입증해주는 훈장과 같다. 10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사무실에서 우수 보험설계사에게 주는 상과 마라톤 기념메달을 앞에 둔 채 자신의 눈이 되어주는 지팡이를 든 유 씨.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빨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두 눈 멀쩡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마흔넷 유장호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매년 우수한 보험 영업실적을 거두더니 올해 10월엔 다니고 있는 보험대리점에서 지사장으로 승진했다. 17개 지점을 총괄하는 자리다. 고객의 얼굴도 못 알아보지만 대신 튼튼한 두 다리와 지팡이 하나로 고객을 찾아가고 또 찾아갔다. 고객의 찌푸린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숱한 냉대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 맹인(盲人)이 될 운명
보험대리점 리더스재무설계의 지사장인 유장호 씨(44)는 망막색소변병증을 앓고 있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다 나이가 들면 전맹(全盲)이 되기도 하는 병이다. 어린 나이에는 야맹증을 겪다가 중년 이후에는 터널 안쪽에서 밖을 보듯 시야가 좁아진다. 대(代)를 건너 발현하는 유전병으로 누나 셋도 모두 같은 병을 앓았다. 유 씨는 고등학교 때까지 병원에 가본 기억이 없다. 경기 의정부시 변두리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자식 넷을 기른 가난한 부모님은 “너희들 운명이다”라고만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조용히 유 씨를 불렀다. “장호야, 너 수업 시간에 보니 교과서에 코를 박고 있더라. 칠판 글씨도 잘 안 보이는 것 같고. 서울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 그렇게 담임선생님 손에 이끌려 당시 서울에서 유일한 안과 전문병원이던 ‘공안과’를 찾아갔다. “학생은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어요. 언젠가 시력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습니다.” 맹인이 될 운명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지금 그의 시력은 신문지를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대고 3분 정도 노려보면 겨우 제호가 보일 정도다. 시력이 떨어지는 걸 늦추기 위해 10년째 한 달에 두 번씩, 목에 있는 성상신경절이라는 부위에 주사를 맞고 있다. 수없이 주삿바늘을 찌른 곳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한쪽 손엔 늘 자전거용 벨이 달린 지팡이가 들려 있다. 지팡이 끝으로 길을 더듬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을 툭 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들리는 짜증 섞인 소리에 아예 지팡이에 자전거용 벨을 달아 ‘따르릉 따르릉’ 울리며 걷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죽고 싶다’를 되뇌며 두문불출하던 어느 날, 부모님이 “놀고만 있을 순 없지 않냐. 마을 농협에서 사람을 뽑더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처음으로 용기를 내 문 밖을 나섰다. 다행히 의정부농협 하나로마트에 취직이 됐다. 큰 박스를 헤아려 재고 조사를 하는 일이었다. ‘이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의욕이 넘쳤다. 든든한 직장이 생긴 김에 친구 소개로 만난 아내와 결혼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배인이 유 씨를 불러냈다. “유 군아, 너 영수증 한번 써봐라.” 하얀 건 종이였다. 볼펜을 손에 쥐고 달달 떨었다. 엉뚱한 곳에 삐뚤빼뚤 매입기록을 써냈다. “언제까지고 재고 정리만 할 수도 없고, 영수증도 못 쓰는데 일을 어떻게 하나. 사회 일은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그렇게 유 씨는 3개월 만에 첫 직장에서 잘렸다.
이제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어엿한 가장이 된 터였다. 아내와 함께 생활정보지 구인란을 뒤지는데, 생활정보지에서 광고영업사원을 구한다고 했다. 기본급 70만 원. 당시 철도청 9급 공무원이던 아내의 월급이 30만 원쯤이었으니 엄청난 돈이었다. 영업이라면 눈이 아닌 입으로 해볼 수 있는 일 같았다. 한참 영업사원이 부족할 때라 회사에서도 유 씨에게 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눈이 안 보이는 대신 부지런함이 몸에 밴 덕분에 영업성과가 좋았다. 임원이 집까지 찾아와 “유 군처럼 일 잘하는 청년은 처음 본다”며 격려를 하고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회사가 문제였다. 3년 만에 부도가 나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직장을 잃은 것을 아쉬워한 것도 잠시, 늘 좋은 영업실적을 내던 유 씨를 눈여겨본 전 직장 동료가 보험설계사 일을 제안해왔다. “장호 씨, 우리 남편이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에서 일하는데 ‘기가 막히게 영업하는 사람이 있다’고 소개했더니 꼭 보고 싶다고 하네요. 한번 가보지 않을래요?” 보험설계사 유장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첫 관문은 보험설계사 자격시험이었다. 수험서를 통째로 전지에 확대 복사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눈에 힘을 줘가며 공부했다. 시험장에서는 문제지를 볼 수 없는 유 씨를 위해 감독관이 문제를 읽어줬다. 100점 만점에 70점 이상을 받아야 합격하는 시험에서 유 씨는 88점을 받아 당당히 설계사 자격증을 땄다. 그렇게 스물넷에 보험설계사가 된 그는 일주일에 하나씩 보험 상품을 공부했다. 상품의 특징부터 가입자 연령별 보험료까지 전부 외워 버렸다. 학창시절 내내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 공부해온 터라 암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교직원 전용 연금보험 남자 30세 개인형 5만3800원, 부부형 7만2600원.” 유 씨는 아직도 당시 공부한 보험 상품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돌입방문 개척영업.’ 기존 고객이 없는 곳에 무턱대고 찾아가 영업을 한다는 뜻으로 보험설계사들이 쓰는 말이다. ‘맨땅에 헤딩하기’인 셈이다. 유 씨는 주로 대학교와 병원을 타깃으로 삼았다. 교수나 의사는 안정적인 고소득자라 보험계약 유지가 잘될 것 같아서였다. 부자 고객들은 비과세 연금보험처럼 세금 혜택이 있는 상품을 주로 찾았다. 자식이나 배우자가 상속·증여세를 낼 때에 대비해 월 100만 원짜리 보험에 가입해두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일종의 ‘리치(rich) 마케팅’이었다.
유 씨는 매일 하루 한 건의 실적을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아침에 대학이나 병원에 찾아가 꼭대기부터 1층까지 빠짐없이 돌고 나면 어둑한 밤이 됐다. 잡상인 신고를 받고 온 경비가 뺨을 때리고 쫓아내도 뒷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어디든 문이 있는 곳은 두드렸다. 병원에서 실수로 시체 안치실에 들어갔을 때, 냉동고 앞에서 유 씨는 생각했다. “아, 저 사람들이 살아있다면 상품을 설명해줄 텐데….”
어두운 눈 때문에 버스에서 굴러떨어지고, 발목을 삐는 건 예삿일이었다. 지금도 그의 정강이는 멍투성이다. 병원을 돌아다니다 수련의들이 먹고 복도에 내놓은 배달음식 그릇을 발로 차서 엎는 일도 많았다. ‘우당탕탕’ 소리에 뛰어나온 병원 직원들이 온몸에 자장을 묻히고 뒹구는 유 씨를 쫓아냈다. 고객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설계사에겐 큰 약점이다. 초등학교에 영업을 하러 나갔을 때 유난히 키 큰 학생을 보고 선생님인 줄 알고 90도로 인사하기도 했다. 유 씨는 목소리와 말투로 고객들을 기억한다. ‘경영대 본관 5층 세 번째 문.’ 고객이 있는 곳은 손을 더듬어 찾는다.
○ 문이 열렸다
‘죽은 사람에게도 보험 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일한 덕에 그는 설계사가 된 이듬해인 1995년 대한생명 소속 전체 설계사 중 5번째로 좋은 실적을 냈다. 벌이도 좋았다. 한 달 평균 400만 원씩 벌어 3년 만에 의정부에서 93m²짜리 아파트를 5300만 원에 분양받았다. 어두운 곳에서는 한 발짝도 옮기기가 어려운 탓에 영화관 데이트 한 번 못해 보고 고생한 아내에게는 빨간 현대자동차 티뷰론을 선물했다. 자동차 값 1400만 원은 한꺼번에 현금으로 냈다. 거의 매년 전국 5위 안에 드는 실적을 기록해 우수 설계사에게 주는 상을 탔고, 2008년에는 보험대리점인 리더스재무설계가 그의 뛰어난 영업실력을 알아보고는 지점장으로 스카우트했다. 올해 10월 지사장으로 승진한 뒤 요즘은 지점의 보험설계사들에게 영업 노하우를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한다. 가끔 대학이나 기업에서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강의를 요청하기도 한다.
이제 그는 또 다른 꿈을 꾼다. 올해 세종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새내기 대학생이 됐다. 제대로 공부해 자신과 같은 시각장애인들을 돕고 싶어서다. 좌절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묻자 유 씨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데, 저는 ‘눈에 뵈는 게 없어’ 용감할 수 있었어요. 앞이 막막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움츠러들지 말고 용감하게 발을 내디뎌 보세요. 열릴 때까지 두드려보세요. 그 문은 틀림없이 열릴 겁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