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 명종에게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비판 상소
명종은 열두 살에 즉위했으나 8년 동안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는 조선시대 최고의 악녀로 꼽힌다. 그는 동생 윤원형 등과 을사사화 등을 일으켜 100여 명의 반대파를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명종의 친정이 시작된 뒤에도 어머니와 외척의 날뜀은 여전했다. 명종은 허수아비 왕이었다. 어머니는 임금의 평생 멍에였다. 임금에게 모후는 역린이었다. 남명이 그것을 건드린 것이다. 거기에다 자신을, 왕위를 감당하지 못하는 어린 고아라고 했다. 군신관계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극언이었다. 상소문을 읽는 임금의 심기가 어떠했겠는가. 명종의 눈에 조정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충언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왕은 대로했다. 조정과 사림(士林) 모두 겁에 질렸다. 왕은 엄중한 처벌을 하명했다. 그러나 여러 중신이 나서 남명과 같은 충신이야말로 나라의 큰 복이라고 옹호하면서 마침내 없던 일이 되었다.
임금만 역린이 있을까? 440여 년 뒤 한국의 어느 대통령에게도 역린이 있었다. 한 참모가 역린을 건드렸으나 대통령은 화를 내지 않았다. 참모는 어떤 화(禍)도 당하지 않았다.
그 대통령에게는 ‘작은 대통령(小統領·소통령)’이라 불리는 아들이 있었다. 집권 초기부터 아들은 인사 등 국정 전반에 두루 개입한다는 소문에 휩싸였다. 질풍노도와 같은 각종 개혁으로 국민의 지지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대통령에게 아들 문제는 쇠락의 불씨였다. 정국의 뇌관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대통령에게 아들 문제를 진언하지 못했다. 대통령의 오랜 가신(家臣)이 아들을 외국으로 보내라고 했다가 혼쭐이 난 뒤로 더 그랬다. 결국 아들은 비리 사건에 휘말렸다. 온 나라가 들끓었다. 청와대 참모들은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들의 구속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마지막 문제는 검찰 소환에 응하지 않는 아들을 검찰에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럴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검찰에 가는 것은 바로 구속을 의미했다. 아무리 민주주의 시대라지만 대통령에게 아들을 구속하도록 하라고 참모들이 간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누구라도 친한 친구에게조차 대놓고 그렇게 하라면 차마 못할 일이라 할 것이다.
마침내 그런 문제를 총괄하는 수석비서관은 결심을 했다. 대통령 대면보고 일정을 잡았다. 전날 밤 그는 대통령에게 할 말을 정리했다. 강한 성격의 대통령이라 단박에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검사 출신으로 시집을 여러 권 펴낸 시인이기도 한 그는 거의 밤을 지새우며 글을 다듬었다. 새벽에 사무실로 나간 그는 비서진에게 A4 용지 반장 분량의 짧은 글이 담긴 종이를 주며 타이핑을 지시했다. 종이에는 연필로 쓴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친 흔적이 역력했다. 그는 대통령 집무실로 올라갔다. 대통령 앞에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수석 자신도 아들을 둔 아버지였다. 아들을 사실상 구속되도록 하라는 부하의 보고를 듣는 대통령의 심정은 어떨까. 그것을 알게 될, 어머니인 ‘영부인’의 심정은.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똑같은 것이 아닌가. 수석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보고를 끝냈다.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짧지만 한없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대통령은 담담하게 물었다.
“그렇게 심각한가.” “네 심각합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대통령은 “내가 검찰에 나가도록 하겠다”라고 잘라 말했다.
수석이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그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채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대통령의 인터폰이 왔다. “걔가 전화했지. 전혀 개의치 말고 일을 처리하라.” 대통령의 아들은 그날 오후 검찰에 나갔다. 그러곤 밤늦게 구속되었다(그 수석에겐 어떤 불이익도 없었다. 그는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청와대를 떠났다. 그 뒤 공직 등 어떤 자리도 맡은 적이 없다. 검사장이었던 그는 후배 사무실에 보수를 전혀 받지 않고 잠시 이름을 빌려 주었을 뿐, 지금까지 변호사 개업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지방에서 살고 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본인의 입을 통해 이 이야기를 들었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