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기 경제부 기자
생명에 값을 매기려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렇다고 꼭 색안경을 끼고 볼 일은 아니다. 국가나 거대기업의 실수로 생명을 잃은 경우 망자(亡者)의 유가족이 힘의 논리에 휩쓸려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내팽개쳐지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처럼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아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각종 제도와 규제들도 마찬가지다. 제도와 규제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정책 수립 과정에 목소리를 내기 힘든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시범 운영만으로 규제비용총량제의 장단점을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몇몇 사례를 보면 탁상 위에서 만들어진 논리로 규제가 도입됐던 과거에 비해 나아진 점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28일부터 전면 시행되는 돼지고기 이력제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소비자들은 돼지고기에 새겨진 식별번호를 통해 이 고기가 어느 농장에서 생산됐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당초 돼지고기에 식별번호를 새기는 방식을 놓고 전자태그(RFID)를 이식하는 방법과 도장을 찍는 두 가지 방안을 검토했던 정부가 전자태그 이식을 포기한 것은 규제비용총량제의 영향이 컸다. 농가가 부담해야 할 규제비용을 측정해 보니 도장을 찍는 방식은 마리당 30원에 불과한 데 비해 전자태그 방식은 130원의 비용이 들어가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규제비용총량제가 없었다면 규제대상인 농가의 부담이 4배 이상으로 많아졌을지도 모르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규제비용총량제가 자칫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측정하기 어려운 규제 비용을 핑계로 규제를 무분별하게 완화하려 한다”는 일부 야권의 반대로 이 제도 도입의 근거를 담은 행정규제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규제비용총량제는 정부가 규제대상의 관점을 고려하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규제비용총량제로 무분별한 규제 완화가 우려된다면 일단 좁은 범위에서 시작하거나 운영방식을 고쳐나가면 될 일이다. 규제개혁은 정치 진영을 초월한 우리 사회의 과제다. 지금도 많은 소상공인은 그들의 전쟁터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며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정치권이 잊지 않길 바란다.―세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