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회고록]〈17〉초선 원내총무
1973년 3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공화당 당의장 서리 임명장을 받고 있는 이효상 전 국회의장. 71년 4월 대통령 선거 다음달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효상은 낙선하고 만다. 현역 국회의장이 처음으로 낙선한 경우였다. 동아일보DB
내가 ‘정치 1번지’인 종로·중구에서 당선되었다는 사실이 전 대통령에게도 상당히 고무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초선인 나를 국회사령탑인 원내총무로 임명한 것이 아닌가 하고, 지금도 생각한다.
사실 당시 국회를 운영하는데 야당보다도 청와대와 민정당 내부가 더 문제였다. 국회의원은 ‘건달’이며, 당의 명령을 수행하는 거수기나 로봇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국회의원의 신분부터 ‘차관보급’이라고 평가절하 했다.
그런 잘못된 인식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시작됐다. 국회의장의 위상만 봐도 곧 알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를 했다 하지만 국회의장이란 위치를 존중했다. 그 자신 의장을 지냈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에도 신익희 의장을 존중했다. 4·19혁명 이후 구성된 내각책임제 국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제3공화국 들어 공화당은 대구에서 당선된 초선 국회의원 이효상을 하룻밤 새 국회의장으로 만들었다. 그는 상임위원장이라도 하면 좋겠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또 유신시대엔 유정회 출신 백두진을 무리하게 의장으로 밀어붙여 차지철의 수족으로 만들려했다.
1981년 9월 첫 정기국회가 열렸다. 그런데 야당인 민한당이 갑자기 예산안 보이콧을 결정했다.
그날 저녁 고 총무를 은밀히 따로 만났다. 그리고 호소했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고 나서 첫 번째 국회입니다. 이번에 만약 여당이 단독으로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전례를 만들면 앞으로 국회는 불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타협방안을 찾읍시다. 고 선배께서 먼저 요구사항을 말씀하십시오.”
나의 진지한 설명에 그도 긴장하였다.
“이것 보세요, 정부에서 긴축예산이라 해놓고 새마을운동본부 예산은 다섯 배로 올려놓았어요. 대통령의 아우가 사무총장이라고 내무위나 예결위에서 한 푼도 깎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여당 마음대로 하십시오. 우리가 왜 거기에 따라 춤을 춥니까?”
“아! 그게 문제였습니까?”
그는 비웃듯이 말했다. 속으로 끓어올랐지만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먼저 권 총장에게 전화를 했다. 권 총장은 일언지하에 “예산안을 원안대로 통과시키라는 것이 청와대 지시”라고 딱 잘랐다. 그 순간 고 총무가 헤어지면서 조소인지 동정인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즉시 청와대로 전화를 했다. 오후 8시를 약간 넘긴 시간이었다. 예산안 때문인지 몰라도 허화평 보좌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지금 각하와 통화하고 싶습니다. 긴급히 결심을 얻고자 합니다.”
“각하는 위층 사저로 올라가셨습니다. 사저로 가시면 비상시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는 것이 각하의 특별 지시입니다.”
“국회 예산처리가 꼬여서 이것도 비상시국이라 생각합니다.”
“급하면 제가 대신 전하겠습니다.”
“그러면 말씀드리지요. 긴축예산이라 해놓고 전경환 사무총장의 새마을 예산은 다섯 배로 올렸습니다. 그래놓고 그 예산을 성역이라고 손대지 말라는 겁니다. 나도 납득을 못하는데 국민이 납득하겠어요?”
“아! 그렇게 됐군요. 전화 끊고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한 시간쯤 지나서 허 보좌관의 전화가 걸려왔다.
“각하께 말씀 드렸습니다. ‘예산안 심사권은 국회가 갖고 있지 않느냐. 국회에서 심사하는데 성역이 어디 있느냐. 소신껏 하라’는 분부십니다.”
나는 고 총무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정재철 예산결산위원장도 함께 만났다.
“고 총무님, 새마을 예산 어떻게 하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고 총무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던 것 같다.
“다른 예산과 같은 수준으로 하면 되겠습니다.”
나는 즉시 정재철 위원장에게 야당이 원하는 대로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전경환 사무총장은 나에게 화풀이하듯 항의했다. 새마을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보다도 자기가 명색이 ‘대통령 아우님’인데 체면을 구겼다고 펄펄 뛰었다.
▼ 詩人 이효상의 횡재… 초선 의원이 하룻밤 새 국회의장으로 ▼
“나중에 국회의장 인선에 관한 내막을 들은 동지들로부터 나는 무지막지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과오였으니까.”
6, 7,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양순직 전 한국자유총연맹총재(2008년 작고)는 회고록 ‘대의는 권력을 이긴다’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5·16 때는 JP(김종필)를 도왔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제명을 당한 뒤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양순직 전 의원, 그가 회오(悔悟)의 심경으로 남긴 ‘국회의장 인선 내막’은 바로 이효상 전 국회의장에 관한 얘기였다.
5·16 쿠데타로 멈춰선 정치 시계는 민정이양과 함께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군복을 벗고 공화당에 입당해 1963년 10월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그 다음달엔 6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6대 국회의 의장은 초대 공화당 총재를 맡았던 청람 정구영 선생으로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선거 직후 박 대통령이 청람에게 부탁까지 했던 일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점점 청람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충남 대덕·연기에서 당선된 김용태 의원이 양순직 의원을 찾아왔다. 원내총무를 하고 싶으니 JP에게 자기를 천거해달라는 것이었다. 원내총무는 이미 민관식 의원으로 내정돼 있는 상태였다.
양순직은 회고록에서 “공화당이 첫 의정활동을 시작하는 6대 국회에서는 김용태 의원이 국민들 눈에 더 참신하게 보일 것 같았다”라고 적었다.
몇 시간을 설득한 끝에 JP의 오케이를 받았는데, 이번엔 국회의장이 문제였다.
JP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구영 선생하고 윤치영 씨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라 골치가 아픕니다.”
“나는 당시 정구영 선생을 잘 몰랐다. 그래서 무심결에 이렇게 말했다. ‘의장 임기는 어차피 2년이니까 처음엔 무난한 사람을 시키고 그 다음에 정구영 선생이 하면 되지 않느냐’고…. JP도 내 말에 관심을 보이며 ‘선배님, 그럼 누가 좋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때 머릿속에 스치고 간 사람이 임시 전당대회 때 시 낭송을 한 이효상 씨였다.”
양순직은 ‘아이디어’ 정도로 말했지만, JP는 다음날 아침 청와대에 들어가 곧바로 박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다. 이종찬의 표현처럼, 국회 문공위원장을 원하던 이효상 의원이 하룻밤 새 국회의장이라는 ‘횡재’를 맞게 된 사연은 그랬다.
그 이효상은 JP와 양순직이 생각한 ‘단순 대타’가 아니었다. 6대에 이어 7대에도 국회의장으로 승승장구했고, 청람과 양순직이 그토록 막으려 했던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신라 1000년 만에 나타난 박정희 후보를 다시 뽑아 경상도 정권을 세우자. 쌀 속에 뉘가 섞이면 밥이 안 되는 법이다. 경상도 표에 전라도 지지표가 섞이면 조가 섞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대중에게 표를 줘서는 안 된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현역 국회의장인 이효상은 대구에서 이런 유세를 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