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이강하(1966∼)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항구다
네 모습이 붉다
내 모습도 붉다
무수한 생명이 남겨놓은 소리
양면성을 지닌 발자국 소리가 빛의 균열에 순응하면
파르르 오감을 느끼는 노을 속 구멍들
먼 바다를 향해 붉은 깃을 세운다
지나간 시간, 어스름의 메아리는
그리움보다 쓰라린 공터의 사색을
즐기겠구나, 검은 울음을
다 토해낸 구멍 많은 어느 당산나무처럼
너와 나의 거리가 멀수록
은밀히 포효하는 형상인가, 끼룩끼룩
기러기 떼 날아올라 우리 자리를 힘차게 다독여도
자꾸만 다른 모습이다
앞뒤가 충만한 황홀함으로
더 깊이 더 가벼운 안식으로
또 다른 계절의 문이 숨을 크게 몰아쉰다
네 모습이 편안하다
내 모습도 편안하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항구다/네 모습이 붉다/내 모습도 붉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황혼 무렵, 또 다른 세계로 떠나는 항구. 시간이나 공간이나 이별을 전조하는 국면이다. 노을빛이 두 사람의 안팎을 붉게 물들인다. 눈시울도 붉고 아린 가슴도 붉을 테다. 지나간 낮의 기척과 다가올 밤의 기미가 뒤섞이는 ‘양면성을 지닌 발자국 소리가’ ‘빛의 균열에 순응하면’, 그제야 ‘파르르 오감을 느끼는 노을 속 구멍들’이란다. 이별의 아픔은 이별의 순간이 아니라 그 뒤에 온다. ‘지나간 시간, 어스름의 메아리’인 노을 속에서 ‘황혼이 되면 지금도 가슴이 타는’ 감정이 ‘그리움보다 쓰라린 공터의 사색’으로 성숙해 가는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