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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골 상아탑, 속 채워야 큰다

입력 | 2014-12-17 03:00:00

[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7·끝>흔들리는 교육 바로 세우자
(下)수술 급한 대학 시스템




서울 명문 사립대 사회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이혜림 씨(24)는 취업 준비로 올해 1년 내내 학교 도서관에서 살았다. 수업은 불과 2과목 6학점. 삼성그룹 직무적성검사(SSAT), 두산그룹 직무적성검사(DCAT) 등 대기업 인적성검사 교재들과 씨름하느라 수업을 제대로 듣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학점을 적게 듣는다고 수업료가 싸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수백만 원의 비싼 등록금을 대부분 대학 도서관 출입비용으로 쓴 셈이다.

입학 당시에는 나름 사회학도를 꿈꾸며 사회에 대한 학문적인 열정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졸업할 수 있는 최소 이수 학점에 맞추고, 성적을 잘 주는 수업만 골라서 들을 만큼 수동적이 됐다. 이 씨가 전공 수업보다 더 공을 들이는 수업은 취업 스터디.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실력 있는 취업준비생이 모인 스터디에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대기업 인턴 경험 횟수부터 인적성검사 모의고사 점수까지, 스터디에 들어가기 위한 스펙도 필요하다.

○ 취업 스펙에 몰입하는 학생들

대학 평가의 가장 중요한 잣대가 취업이 되면서 대학 본연의 면학 분위기가 사라진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학생에게 대학은 취업을 위한 요건 중 하나일 뿐이다.

전공에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사연은 구구절절하다.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시간을 들여 다양하고 창의적인 스펙을 개발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대학 수업이 파행으로 이뤄지는 배경에 대학생들은 “취업과 학업이 이분법화되어 있어 어느 한쪽에 쏠리면 다른 한쪽이 자연스레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실제 희망하는 직군별로 갖춰야 하는 스펙은 가지각색이다. 대기업 취직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중앙정부, 기관, 지자체, 재단, 협회, 공기업, 학회 등 다양한 곳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지원해 입상하는 게 최대 목표다. 이전까지만 해도 토익 점수와 어학연수 경험 정도가 기업들이 원하는 주요 스펙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공모전 경력이 채용의 주요 항목으로 지목되면서 대학생들의 관심이 뜨거워졌다.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 3학년 이지영 씨(22)는 “공모전 정보들을 모아서 제공하는 스마트폰 앱이 인기리에 이용되고 있다”라며 “앱은 응모 분야별, 기업 유형별, 응모 대상별, 시상 규모별, 특전별로 구분해 원하는 분야의 공모전 정보를 쉽고 빠르게 확인해 대학 취업센터보다 더 좋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공무원이나, 출판계, 교육 관련 기업 취직에 관심 있는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한국어능력시험과 한국사시험이 대세다. 자격증도 학과별로 천차만별이다. 요즘 사회학과, 행정학과에서는 노무사 자격증이, 정치외교학과, 신문방송학과에서는 사회조사분석사 자격증이 유행처럼 퍼졌다. 문제는 이런 시험이나 자격증이 대학의 교육과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은 학교는 학교대로 등록금을 내고, 취업 사교육은 사교육대로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 양적 연구업적에 매몰된 교수들

대학생들이 스펙 쌓기에 골몰하는 동안, 교수들도 학교에서 매년 시행하는 업적 평가에 머리가 아프다. 특히 사립대 교수일수록 논문 편수에 따른 평가 결과에 민감하다.

서울의 한 명문 사립대는 조교수-부교수-정교수로 승진할 때 논문 편수가 절대적 기준이다. 이 학교의 업적 평가는 1년에 한 번 시행된다. 평가 결과 교수들을 S, A, B, C등급으로 나누는데, 내리 세 번 C등급을 받으면 연구실을 반납해야 한다.

이 사립대 A 교수는 “정교수가 되기까지 대락 10년이 걸리는데 매년 2편씩 총 20편 이상의 논문을 써야 하는 구조”라며 “한 해에 두 편은 쓸 수 있어도 10년을 연속으로 학문적으로 의미 있는 연구를 찾아내며 논문을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다른 사립대 B 교수는 “이번에 건축공학과 교수 한 분이 학교를 나간다. 대학들이 업적 평가를 지난 10년간 강화해온 결과, 이제는 그 결과가 승진 탈락으로 나타나기 시작해 교수들이 더욱 긴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무분별한 양적 평가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온다. 기본적인 내용만 전달하되, 열성을 가지고 과제물을 더 내준다거나 세미나를 열어 학생들을 공부시키는 데 여력을 쏟지 못한다는 것이다.

A 교수는 “등급을 잘 받기 위한 요령은 기계적으로 최소한의 강의를 담당한 뒤 휴강은 금물이며, 가르쳐야 할 내용을 최소화해 가르치는 것이다. 규정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소한의 의무만 해야 한다”며 “이런 상황을 학생들이 잘 알 텐데도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은 오히려 고마워해서 문제”라고 말했다.

대학생들의 스펙 쌓기와 교수들의 업적 쌓기가 맞물려 상아탑은 총체적인 위기를 맞게 됐다. C 교수는 “대학의 발전을 위해서 교수들을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가를 위한 평가는 지양해야 한다”라며 “취업난을 맞은 대학생들의 요구를 대학에서 어느 정도 수용하는 동시에 교수평가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꾀할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 위기의 캠퍼스, 해법은 없나… ‘대학=학문의 전당’ 고정관념 깨야 ▼

국내 고교 졸업자의 대학 진학률은 약 71%(2014년 3월 기준)에 이른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 직업이 세분되고 전문화된 유럽에서도 대학 진학률이 30%대인 점을 감안하면, 국내 대학들도 더이상 전통적인 상아탑의 역할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사회 특성이 변화하는 만큼 대학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 197개 4년제 대학을 학문적 성과에 집중하는 ‘연구중심대학’과 학생 교육에 방점을 둔 ‘교육중심대학’으로 나눠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모든 대학이 오롯이 학문적인 교육 서비스만 제공한다면 대학과 학생 사이의 괴리는 더욱 깊어질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것이다.

박주호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는 “대학에 유입된 학생들의 사회적 계층이나 상황이 변화하는 것에 맞춰 대학의 성격과 기능도 변화해야 한다”며 “우리나라 대학 중에 10∼20%는 연구 중심으로 방향을 잡고 80∼90%는 학생의 요구에 맞춰 실용적인 교육으로 커리큘럼을 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대학시스템이 수십 년에 걸쳐 구축됐기 때문에 연구중심대학과 교육중심대학을 칼로 무 자르듯 나누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대다수 대학이 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현실에서 현실적으로 교육 중심의 학부와 연구 중심의 대학원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시스템을 재구성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은 각 대학에서 학문 분야별로, 또 지역적 특색에 따라 특성화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변기용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건양대, 한동대, 대구가톨릭대 등은 모두 학부중심 교육을 표방하지만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정 부분 연구를 해야 교육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학부교육이 학생의 취업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되 개별 학교 단위로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수가 연구와 교육 활동을 적절히 배분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유연한 교수평가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변 교수는 “대학의 특성화 목표에 맞춰 연구를 잘하는 교수는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또 교육을 많이 한 교수는 연구를 덜 할 수 있도록 연구와 교육의 ‘트레이드오프’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영찬 한양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미국 대학들은 교수에게 대표 논문 5편을 제출하도록 한 뒤 논문에서 해당 교수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외부의 교수들에게 동료 평가를 하도록 한다”며 “양도 중요하지만 질을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한국 대학에도 도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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