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원 산업부 차장
얼마 전 만난 대기업 임원 A 씨가 전한 이야기다. 몇 해 전 해외 출장길, A 씨는 비행기에서 책 한 권을 승무원에게 건넸다. 그는 “시간을 보내려고 샀던 책을 금방 다 읽었는데, 내용이 좋아 별생각 없이 권했다”고 말했다.
이후 목적지에 도착해 내릴 채비를 할 때다. 책을 받은 승무원이 기내 기념품 몇 개를 따로 챙겨주며 감사 인사를 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복잡한 일반석이 아니라 승객이 적은 비즈니스석이어서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승무원의 표정에서 진심이 보였다는 것이 A 씨의 설명이다.
“그때 스튜어디스도 감정노동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평소 이런저런 좋지 않은 상황에 시달리다 보니 작은 일에도 감동한 모양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대 앨리 러셀 혹실드 교수가 창안한 감정노동자(emotional labor)라는 개념은 항공기 승무원의 처지와 딱 어울린다. 감정노동자는 직업 때문에 본인의 감정을 숨긴 채 일하는 근로자들이다.
최근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에서 초점이 맞춰진 것은 오너 가(家)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독선과 횡포, 그리고 사태에 대처하지 못한 대한항공의 위기관리 능력이다. 이 때문에 감정노동자인 승무원들이 그 당시 느꼈을 당혹감과 분노에 관한 관심은 한 겹 뒤로 묻혀 버린 모양새다. 더구나 자신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진 오너의 행동에서 그들이 느꼈을 ‘공포’는 ‘진상 고객’을 대하는 심정과는 차원이 달랐을 것이다.
현대카드는 콜센터에 전화해서 성희롱이나 욕설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두 차례 경고 후 아예 전화를 끊어버리는 대응 방안을 2012년에 도입했다. 직원을 보호한다는 명목이다.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은 트위터로 “직원들과 선의의 고객을 지키는 것이 진짜 서비스”라고 설명했다. 경영진이 콜센터 직원을 회사의 서비스 창구가 아닌 감정노동을 하는 ‘동료’로 끌어안은 결과다.
앞서 A 씨가 승무원에게 건넨 책은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다. 고인이 된 포시 교수는 컴퓨터 공학자이지만 학생들에게 ‘팀워크를 통한 성공’을 강조한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룹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법을 전하면서 몇 가지 팁을 제안했다.
‘정중하게 사람들을 대하라’ ‘상대한테서 공통점을 찾아라’ ‘모두가 이야기하게 하라. 남의 말을 자르지 마라’ ‘대안을 내놓으려면 질문 형식으로 하라’.
이 모두가 문제를 일으킨 조 전 부사장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요소이다. 따지고 보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오너 경영자가 승무원들을 ‘보호해야 할 직원’이나 ‘같은 회사의 동료’로 생각하지 않았던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