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32> 프로골퍼 김효주와 아버지
1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효주(롯데)는 자랑부터 했다. 소방헬기 추락사고 순직 유가족을 위해 강원도청에 5000만 원을 기부해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에게 감사패를 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가슴에 흰 별 장식이 붙은 김효주의 검정색 정장은 12월 들어서만 기자가 시상식에서 네댓 차례 봐 익숙한 차림이었다. 19세 소녀의 발랄하고 수수한 모습이었다.
김효주는 올 시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대상 등 4관왕에 올랐다. 9월에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 대회인 에비앙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올해 국내외를 합해 7차례 트로피를 안은 그는 상금과 보너스 등을 합쳐 40억 원 넘게 벌었고, 롯데와 5년간 총액 65억 원(인센티브 제외)에 재계약했다. ‘100억 소녀’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의 곁에는 아버지 김창호 씨(56)가 항상 있었다. 인터뷰 도중 아버지가 주차해 둔 차를 옮기러 잠시 자리를 비우자 “아빠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다. 딸을 위해 많은 걸 희생하셨다”고 했다. 평소 쑥스러워 대놓고 하지 못한 말을 기자에게 털어놓은 것이다.
김효주의 경기 용인시 집에는 수많은 트로피와 함께 대형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두 살 때 캘린더 모델 경연대회에 참가해 찍은 것이라고 한다. 사진 속 아이는 장난감 골프채와 캐디백을 메고 있다. 아버지는 “그 어린 아이가 하필 골프용품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참 희한하다. 인연이 있었나 보다”고 했다.
김효주는 6세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강원 원주시 집 근처 스포츠센터 태권도학원을 갔다 골프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말이다. “원장이 내 선배였는데 효주의 운동감각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골프가 맞겠다며 권했다.”
엄마들의 ‘치맛바람’에 빗대 골프 스타들은 대개 골프에 반쯤 미친 아빠들의 ‘바짓바람’을 받지만 사실 김 씨는 골프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그는 “오히려 그게 약이 됐다”고 했다. “아빠가 이런저런 간섭을 했다면 아마 반발심리가 생겨 다른 길로 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딸이 골프를 시작한 이후 나도 책이나 TV 등을 보며 공부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회에 나가 천재성을 인정받은 김효주의 골프 수업은 한연희 전 국가대표 감독이 10년 넘게 가르치고 있다. 그 대신 아버지는 올바른 정신자세와 발육에만 전력을 다했다. “감정 조절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성과가 안 좋다고 남의 탓을 할 때는 따끔하게 혼을 냈다. 이젠 딸아이 걸음걸이만 봐도 대충 그날 스코어가 짐작될 정도다.”
승승장구하던 김효주는 중3 때인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 대회를 앞두고 1타 차로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아시아경기만 바라보고 운동해 왔던 그에게는 큰 상처였다. 김효주는 “운동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재도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빠의 격려와 위로가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멘털 슈퍼 갑’으로 통하는 김효주. 비결을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긴장감을 굳이 극복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할 도리만 하면 그만이다. 골프장에 들어가 잔디를 밟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곳에서 날 건드릴 사람은 없다.”
○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이런 강철 심장은 엄청난 훈련의 산물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매일 밤 2시간 넘게 빈 스윙을 하며 기본기를 다졌고 클럽 헤드가 닳을 정도로 공을 쳤다. “처음엔 아빠나 코치님이 시켜서 한 것인데 훈련을 반복할수록 좋아지는 걸 느끼니까 나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더라. 선수로서 내 골프는 90점이 만점이다. 남은 10점을 채우기 위해 늘 노력할 것이다. 100점이 됐다고 여기면 은퇴해야 한다.”
김 씨는 “늦잠 자다가도 골프 연습하러 가자고 하면 벌떡 일어났다. 대회 때 열이 40도까지 올라 포기하자고 했는데 결국 출전해 트로피 들고 병원 간 적도 있다”고 했다. 부상은 늘 그를 따라다니는 짐이다. 올해 에비앙챔피언십 때는 아킬레스건을 심하게 다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김효주는 “연습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빠가 주물러 주려 해도 통증이 너무 심해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김효주는 내년 LPGA투어에 진출한다. “영어 소통이 가장 부담스럽다. 또 부상이 걱정이다. 아프면 집중이 안 된다. 안 다치고 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내년에 만 20세가 되는 그에게 좌우명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잠시 머뭇거리다 최근에 ‘스무 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아버지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자 “에이, 연습 많이 하라는 말 아니냐”고 받아쳤다.
딸의 아양 섞인 비난에도 아버지의 당부는 이어졌다. “골프장 직원, 캐디, 갤러리들에게 늘 감사해야 한다. 우리를 위해 고생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맞다. 올해는 특히 감사할 일이 많았다. 누군가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할 때 더 기쁜 것 같다. 버디 했을 때보다 더 좋더라”고 답했다. 요즘엔 자식들과 대화가 어렵다는 아버지들이 많은데 두 부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저런 믿음이 지금의 김효주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갈 무렵 옆에 있던 김효주의 매니저가 이제 4시간 동안 피트니스클럽에서 운동을 해야 한다며 인터뷰 마무리를 부탁했다. 그 말을 듣고 김효주가 환하게 웃으며 아빠에게 던진 말은 이것이었다. “점심은 빵으로 해결하겠으니 아빠는 따로 드셔야겠네요.”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