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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국민에게 감동 주는 인사 하면 신뢰 살아날 텐데…”

입력 | 2014-12-22 03:00:00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최영훈]김황식 前 국무총리




《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한 달 전쯤 정부서울청사 인근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집무실의 집기는 소박했고 직원도 한 명만 뒀다. 2010년 10월부터 2년 4개월 동안 총리로 재임한 그는 1987년 직선제 이후 최장수 총리다. MB(이명박 대통령)가 제일 잘한 일 중 하나가 그를 총리로 지명한 것이라는 말이 나왔을 만큼 재임 중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5월 그 평가를 훈장처럼 달고 나섰지만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선 정몽준 의원에게 패하는 아픔도 겪었다. 한 해를 보내는 심경을 묻자 그는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정말 인사가 만사”라며 투명한 인사와 탕평인사를 강조했다. 국민이 하는 인사, 서울시장 선거 출마 경험은 어땠을까. 새누리당 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그는 “후회는 없다. 그러나 다신 안 한다”고 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어떻게 보는가.

“헌재가 신중하게 판단해 내린 대단히 의미 있는 결정이다. 통진당과 같은 극단적인 종북 세력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홍역을 치렀고 국민이 걱정했는가. 앞으로 건전한 진보와 보수의 가치가 병존하고 서로 경쟁하며 협력해서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정윤회 문건’ 사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무엇보다 정치권에서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 안타깝다. 국정운영이나 사회통합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장기화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청와대부터 열린 마음으로 국민이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 국민의 시각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대통령의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국민이 다 느끼는 것이다. 대통령이 각계와 폭넓고 두텁게 소통하기를 바란다. 대통령의 투철한 애국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애국심을 실천하는 방법인 국정운영에 대해 많은 국민이 걱정하고 있다.”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해소 힘들다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평생 공직에 몸담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사람을 만나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생각도 깊어지고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대통령이 열린 자세로 투명한 인사와 탕평인사에 좀 더 힘쓰고 총리나 장관에게 책임과 권한을 주면 국정운영이 훨씬 원활해지고 대통령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정윤회 문건 사태는 특검으로 갈 것 같은가.

“국민이 수사 결과를 얼마나 납득하느냐가 관건이 되지 않겠나. 문건의 유출 경위는 해결됐지만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정 개입 의혹은 해소되기 힘들 것 같다. 그렇더라도 범죄행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특검 대상이 되긴 힘들다. 법률적으로 따질 일이 아니라 정치적인 해결 차원에서 국정조사를 하면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세월호 진상조사와 특검이 예정돼 있는데….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발생했고 수습 과정도 소모적으로 흘렀다. 진상조사는 정파적 이해가 아니라 객관적 합리적인 사실에 입각해 결론을 내리고 국민의 공감을 얻는 방향으로 매듭을 짓고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진상조사 과정에서 몰랐던 사실이나 새로운 의혹이 나오면 모를까 특검까지 계속 소모적인 논쟁을 이어가서는 안 된다.”

“선거 져도 개혁 해야” 이런 리더 없나

―내년은 광복 70주년인데….

“정치도 불안하고 경제도 어렵다. 주변국과의 관계도 녹록지 않다. 양극화 지역 이념에 이어 세대 간의 갈등까지 증폭되고 있다. 이래선 선진국의 문턱을 결코 넘지 못할 것이다. 국민통합과 노사정의 대타협이 요구되는 시기다. 정치권이 문제 해결의 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면 국민이라도 적극 나서야 한다.”

―노사정 대타협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합리적 노사문화가 정립되지 않으면 경제발전도, 사회통합도 어렵다. 당장 각자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서 접근하면 해결이 안 된다. 독일 슈뢰더 전 총리의 ‘어젠다 2010’과 같은 포괄적 노동사회개혁 프로그램이 우리에겐 불가능한 건가. 국익을 생각하는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그는 슈뢰더처럼 국익을 위해 선거 패배와 같은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뛰어넘는 용기를 지닌 정치지도자들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관(官)피아’가 도마에 오르면서 공무원 사회가 술렁인다.

“관피아로 대표되는 공직사회에 대한 개혁은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 그러나 공무원도 나름대로 애국심을 갖고 노력한 집단이다. 필요 이상으로 공무원 전체를 너무 매도하면 사기가 저하되고 결국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잘될 것 같은가.

“공무원연금 개혁을 촉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공무원들이 경청해야 한다. 그러나 똑같은 결론이 나오더라도 설득하고 대화하는 절차와 과정이 중요하다. 총리 재임 중 수사권 조정 문제로 검찰과 경찰이 충돌했다. 결론을 내기 전에 날을 잡아서 오전엔 총리실로 순경 등 하급직 경찰 대표 10명을 부르고 오후엔 젊은 검사 등 검찰 대표 10명을 불러 절충안을 설명하고 의견을 구하는 과정을 거쳐 순조롭게 마무리한 일이 있다. 연금 개혁 문제도 결론을 정해 놓고 작전을 하듯이 끌고 가면 앙금이 남고 나라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을 타본 적이 있나.

“가끔 이용한다. ‘지공거사’(65세 이상 지하철 공짜의 의미)에 해당하지만 돈을 내고 탄다. 여유 있는 친구들에게도 유료로 타라고 권한다.”

―무상복지 문제는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총리 때 욕을 먹어가며 무상복지 문제를 제기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미래세대에 재앙이 될 것이다. 자식 손자의 신용카드를 아버지 할아버지가 미리 사용해서야 되겠는가. 복지정책을 근본적으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 다음 선거 때가 되면 늦다. 정치권은 비슷한 악순환을 반복할 것이다. 결국 국가의 장래를 위해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서울시장 경선 후회 없지만 다신 안해

―‘땅콩 회항’으로 국격이 떨어진 것 같다.

“친분이 있는 독일인이 ‘조양호 회장이 기자회견에서 가정교육 문제를 거론하며 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참 독특하게 보였다’고 얘기하더라. 모든 가족이 회사 경영에 투입되는 것 같은 재벌 경영을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가.

“하느님이 별다른 세계로 여행을 시켜주신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정말 어렵고 힘들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꼈다. 후회는 없다.”

―선출직 도전을 다시 할 생각은 없나.

“여건상 그런 기회는 없을 것 같다. 많이 부족하고 생각도 별로 없다. 다른 분야에서 다른 방식으로 국가를 위해 기여할 일을 생각하고 있다. 그런 연장선에서 정치가 바른 방향으로 나가는 데 역할이 있다면 하겠다.”

―어떤 활동을 구상하는 건가.

“내년 7월 광주에서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린다. 광주가 유치한 최대의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광주가 인권과 정의만이 아니라 젊음과 미래 비전을 갖고 새롭게 성장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젊은 판사 시절, 그리고 총리에서 물러난 직후 독일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는 그는 ‘독일유학생 네트워크(아데코)’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치개혁과 노동개혁, 독일통일 과정 등에서 우리가 독일을 모델 삼아 배울 수 있도록 한독 교류협력을 위한 활동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다.

―독일에서 배울 게 뭔가.

“독일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은 독일 정치에 힘입은 바 크다. 정치가 우리나라처럼 경제에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 대립되는 의견을 합리적으로 절충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다. 독일은 다당제 국가로 1당이 독주하지 않고 2개 정당의 연립정권이 국정을 담당해 대화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다. 정당투표에 의해 정확하게 의석이 배분되는 독일의 선거제도가 독일의 사회통합에도 기여한다. 우리도 선거구제 개혁을 할 때 이 제도의 장점을 살리는 방안을 고려해 봤으면 한다.”

총리 재임 중 그는 2011년 12월 경기 평택시 송탄의 소방관 2명이 화재 진압을 하다 숨졌을 때 의전실에서 관례상 가지 않는 게 좋겠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러나 조문객을 맞는 어린 상주의 안쓰러운 모습을 TV로 본 뒤 총리실에 알리지 않고 수행비서와 단 둘이서 조용히 조문한 일도 있다. 그는 법의 본질이 ‘배려’라고 생각할 만큼 배려를 중시한다. 한겨울 추위에 떨며 공관 경비를 서는 경찰을 보고 난방이 가능한 유리 초소를 만들게 한 일도 있다.

―연평도 전사자 1주기 때 비를 맞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행사 도중 비가 내리면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추모식의 대표로서 우산을 쓰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다. 지나고 보니 근엄하고 원칙적이고 잘 짜인 모습에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게 아니더라. 사소한 것을 고치고 꾸밈없이 느낀 대로 했을 때 좋은 평가를 하는 것 같았다. 직위가 높은 공직자일수록 겸손하고 온유하며 소탈한 자세가 필요하다.”

―페이스북에 ‘총리가 국회만 안 나가면 할 만하다’고 농담한 일이 있다.

“국회가 열리면 의원들의 질문에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힘들긴 하지만 의원들이 국민을 대표해 질문하고 총리가 답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질문을 듣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정리하는 기회를 갖는다는 의미도 있다. 그런 점에서 대면보고는 꼭 필요한 것 같다.”

―유일하게 청문회와 인준투표를 3번이나 경험했다.

“대법관 감사원장 때보다는 아무래도 총리 지명 때가 힘들었다. 청문회 때문에 자리를 피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파행 인사의 한 원인이 아닌지 모르겠다. 인사는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인사를 하면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 살아나고 국민통합에도 도움이 될 텐데….”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