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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말 바이러스’의 힘… 학교폭력 줄고 마을 분위기 달라져

입력 | 2014-12-23 03:00:00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동아일보-채널A 연중기획]
“말이 아이들을 바꿨습니다”




2014년 말세바 한마디 막말에 상처받고 고통받고 죽음까지 이르는 각박한 세상. 올해 동아일보는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 연중기획 시리즈를 통해 욕설과 막말을 멀리하고 바른말, 고운말을 쓰자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이에 가정, 학교, 직장 등에서 말 때문에 스트레스나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 많은 공감과 응원을 보내왔다. 2015년에는 타인을 살리는 말, 사람을 감동시키는 말이 우리 사회 곳곳에 넘쳐나길 기대해본다.

2011년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별내중의 이경복 국어교사(53)는 학생 중 25명을 뽑아 교실에 모았다. 영문을 모른 채 모인 아이들은 이 교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 씨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너희들과 나는 ‘아띠’ 동아리란다.”

“아띠가 뭐예요, 선생님?”

학교와 이웃 사회에 ‘고운말 바이러스’를 퍼뜨린 경기 남양주시 별내중 동아리 ‘아띠’ 학생들이 고운말 쓰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왼쪽 사진). ‘고운말 쓰기 행복통’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충북 충주시 엄정초 장미희 교사와 학생들이 바른말을 쓰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담은 손바닥 도장이 찍힌 액자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별내중·엄정초 제공

이 교사는 “오랜 친구를 이르는 말”이라며 “친구들의 잘못된 말과 언어습관을 우리가 한 번 바꿔 보자”고 제안했다. 3년 뒤 별내중 전교생들과 주변 이웃 주민들에게까지 퍼진 ‘고운말 바이러스’의 시작이었다.

○ 공감, 언어습관을 바꾸다

이 교사의 처음 고민은 ‘학교폭력’이었다. 아이들 사이의 다툼을 줄이기 위해 싸움의 발단을 관찰하고 분석했더니 거친 말이나 욕설이 발단이 된 경우가 많았다. 훈계도 하고 “고운말을 써야 한다”고 수업시간에 교육도 했지만 아이들은 좀처럼 듣지 않았다. 고민하던 이 교사는 이 또래 아이들이 어른이나 선생님보다 친구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그래서 결성한 동아리가 ‘아띠’였다.

이 교사와 아띠는 차근차근 활동을 시작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친절한 말, 부드러운 말을 많이 쓰는 학생은 ‘고운말 으뜸이’로 뽑았고, 반대로 욕설이나 비속어를 자주 쓰는 ‘거친말 으뜸이’도 뽑았다. 고운말 으뜸이에게는 으뜸배지를 달아주고, 벽에 ‘명예의 전당’ 사진첩을 만들어 사진을 걸었다. 거친말 으뜸이로 뽑힌 학생은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언어 습관을 바꿔갔다.

동아리 자체 활동으로 시작했던 아띠의 프로그램들은 다른 교사와 학생들의 호응을 얻으며 전 학급으로 퍼졌다. 매달 한 번씩 모든 반에서 고운말·거친말 으뜸이가 선발됐다. 고운말 으뜸이들과 거친말 으뜸이들이 학교에서 이틀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고운말 1박 2일 캠프’도 생겼다. 습관적으로 비속어를 내뱉던 학생들은 고운말을 쓰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잘못된 언어습관을 깨달았다.

주민들도 아띠의 활동에 찬사를 보냈다. 아띠의 활동 중 하나는 좋은 시나 명언을 엽서로 만들어 나뭇가지에 거는 것. 이 활동은 교내에서 주변 등산로로 확장됐다. 학생들이 걸어놓은 엽서를 읽은 주민들은 학교에 전화를 걸어 “잘 봤다” “너무 좋다”며 격려했다.

별내중과 아띠는 이내 지역사회의 명물로 떠올랐다. 17일 아띠 신입생 면접을 본 이 교사는 “스무 명 남짓 뽑는데 백 명 넘게 아이들이 몰려왔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혼내기만 했다면 이런 변화가 생길 수 없었을 것”이라며 “훈계보다는 공감이 아이들의 말을 바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 어릴 때 배운 말이 평생 간다

충북 충주시 엄정면 엄정초에 근무하는 장미희 교사(35)도 지난해부터 ‘행복通’이라는 고운말 프로그램을 만들어 아이들과 활동해오고 있다. 장 교사는 방학식날 특별한 숙제를 낸다.

“여러분, 책이나 드라마, 영화를 보고 마음에 닿는 글귀나 대사를 공책에 적어오세요.”

그렇게 아이들이 공책에 적어온 문구를 개학날 함께 모여 엽서나 쪽지로 만들어 가족들에게 보내기도 하고 학교에 붙여놓기도 한다. 말 습관을 바꾸기 위한 ‘21일간의 약속’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은 ‘자주 써야 할 좋은 말’ ‘쓰지 말아야 할 나쁜 말’을 종이에 적고 그 옆에 서약의 의미로 ‘핸드프린팅’(손바닥 도장)을 찍는다. 장 교사는 “한 연구 결과에서 사람의 습관이 정착되는 데 최소한 21일이 걸린다고 한 내용을 보고 시작했다”고 말했다. 21일이 지나면 학생들은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켰는지 돌이켜보고 잘한 학생들에게는 시상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에게는 변화가 나타났다. 이전에는 옆에서 상급생이나 중고교생들이 비속어를 쓰면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했지만 이제는 “형, 누나, 그 말은 나쁜 말이에요, 쓰면 안 돼요”라고 말하며 나무랐다. 나쁜 말을 걸러듣고 스스로 방어할 수 있게 된 것. 어린 동생들의 꾸중에 나이 많은 상급생이 멋쩍어 하기 일쑤였다.

장 교사는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주변 중고교생들의 욕설이나 비속어를 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이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 입에 밴 언어습관은 평생을 간다”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나쁜 언어에 물드는 것을 막고 좋은 언어에 많이 노출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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