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의사 이정렬의 병원 이야기]‘표준’이 한국의료 선진화를 이끌 것이다

입력 | 2014-12-23 03:00:00


표준진료지침은 의료 한류에도 전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 대학병원에서 심혈관 수술을 받은 러시아 환자와 담당 의료진. 동아일보DB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보험을 갖고 있는 한국이 현재 당면한 제1과제는 한정된 건강보험재정 안에서 보장성을 최대한 강화하면서 적자폭을 어떻게 하면 줄이느냐 하는 점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진료수가 적정성 판단용 ‘표준진료지침’과 지침을 실행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산출인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데이터가 없다.

환자와 가족은 물론이고 의사들이 신뢰할 수 있는 최상의 의료 서비스와 환자 안전을 보장하는 ‘지침’을 만들고 이를 명문화할 때만이 한국 의료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런 점에서 최근 대한의학회가 임상진료지침 연구사업단(임상진료지침정보센터·KoMGI·www.guideline.or.kr)을 발족시킨 점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이미 표준지침을 만들 전문가 그룹이 있고 여기에 관심 있는 의사나 그룹을 대상으로 홍보와 교육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진료지침을 만들어야 할 의사들이 진료와 연구라는 일상 업무에 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다.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집단 지성이 뭉친 의학회 산하 158개의 단위학회(대한내과학회 대한외과학회 대한흉부외과학회 등)가 필요성과 취지를 공유하겠다는 의지만 갖는다면 언제든지 한국 고유의 최고 진료지침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작업 범위와 작업량은 방대하겠지만 조금만 더 관심과 실천 의지를 끌어낼 수 있다면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세계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 최신-최상 치료법 정리한 임상진료 지침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도대체 임상 진료지침이 뭐길래 그리도 중요하다고 말하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임상진료지침이란 한마디로 전 세계에 보고된 최신의 과학적 정보와 함께 한국 내 치료 결과를 통합적으로 분석하여 최신 최상의 치료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일종의 ‘진료대본’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가장 양질의 근거(current best evidence)까지 사용해 환자들에 대한 진단과 치료 방법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지침대로 따르기만 하면 안심하고 안전하게 가장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병원에서나 표준화된 양질의 ‘의료 서비스 대본’에 따라 치료를 받기 때문에 비효과적이고 위험하고 낭비적인 치료를 없앨 수 있어 의료비 절감에도 기여한다. 또 대본을 만드는 과정에는 ‘보험재정’을 감안할 수밖에 없어 진료지침 개발자 및 사용자와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일방적이고 부적절한 정책 적용을 원천봉쇄할 수 있다는 말이다.



○ 국민-의료계-정부 모두에 이익


환자와 의료계와 정부가 서로 합의하고 공개된 대본을 앞에 놓고 의료비용을 산출하기 때문에 상호 신뢰의 문화까지 자연스럽게 덤으로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지침이나 가이드라인은 권고 사안이기 때문에 이것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마치 건축자재들의 규격이 통일되어 있으면 초보자들도 집짓기가 편하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것처럼 의료지침도 표준화해 이를 참고하면 환자 입장에서는 어느 병원을 가도 비교적 안심하고 저렴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진료지침을 만드는 과정을 가상으로 꾸며 보면 이렇다.

①지침의 테마(고혈압 관상동맥질환 등)가 결정되면 지침 개발위원회가 구성된다 ②개발, 검토 및 수정, 이해당사자 간 의견 청취, 최종 발행 배포 과정을 기획한다 ③방대한 양의 문헌을 검색하고 선택 평가하여 각종 근거를 종합하고 등급화해 치료 근거의 평가와 표를 만든다(메타분석·meta analysis) ④권고안을 도출한다 ⑤이해당사자가 모여 경제적 타당성까지 포함하는 합의안을 도출한다 ⑥출판하고 배포한다 ⑦외부 검토와 갱신계획을 결정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제작되는 지침을 수행하는 데 드는 의료비를 개관적으로 산출해 낸다면 그 비용의 적정성과 타당성에 대해서도 국민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더이상 허접한(근거 없는) 의료정보들은 발붙일 틈을 찾기 힘들 것이고 의료계도 근거 없는 허위, 부당, 과다 청구의 누명을 벗어 그리도 염원하던 국민으로부터의 신뢰와 존경을 회복할 것이다. 정부도 건강보험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고 남든 모자라든 보험재정 활용에 대해 국민 모두가 신뢰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의료의 질과 장점을 글로벌 의료계에 제시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제공한다면 한국 의료의 세계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호에는 필자가 치료하는 환자의 예를 들면서 표준지침이 만들어지면 어떤 세상이 가능할지 가상 대본을 하나 작성하여 공감해 보고자 한다.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