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논설위원
‘땅콩 회항’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비슷한 행동이 반복되다가 외부로 표출된 사건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2008년 홍승용 인하대 총장의 돌연 사퇴도 재단 이사를 맡고 있던 조 전 부사장의 막말 때문이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홍 전 총장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경복고 동기동창이다. 홍 전 총장이 분노한 이유는 친구 딸인 조현아의 무례한 태도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조현민 전무가 “이번 사건은 모두의 잘못”이라고 발언한 것도 조 씨 자매가 사안의 본질을 얼마나 잘못 파악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부족하지 않다.
스티브 잡스를 보면 언행이 무례하다고 경영자로서 능력까지 없는 건 아니지만 언제나 그렇듯 잡스는 예외다. 잡스는 재벌 2, 3세도 아니었고 기업을 자식에게 물려주지도 않았다.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경영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도덕성이라고 말했다. “도덕성은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타인이 모방하는 품성이기 때문이다.”
‘땅콩 회항’ 사건은 선대가 이뤄놓은 가업을 자식들이 무작정 물려받는 풍조에 경종을 울린다. 삼성 현대자동차 LG SK 등 우리나라 대다수 기업들이 2, 3세 경영을 한다. 2, 3세 경영 자체는 문제가 없다. 세계적 기업인 도요타, 포드, 월마트, CNN 등도 일가가 가업을 물려받고 경영에도 참여한다.
선진국과 한국의 가업승계에는 차이점이 있다. 첫째, 외국 기업들은 가업을 넘기기 전에 자녀의 능력을 검증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둘째, 경영권과 소유권 승계를 분리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방문했던 스웨덴 발렌베리가가 대표적이다. 발렌베리 출신은 회사를 맡기 위해 해군장교 복무, 부모 도움 없는 명문대 졸업, 해외 유학, 발렌베리가 아닌 회사에서의 근무라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특히 해군장교 복무는 발렌베리 가문이 리더십과 애국심을 중시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최태원 SK 회장 부부 차녀의 해군장교 지원이 그토록 관심을 끌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346년의 가족기업인 독일의 머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약 화학기업이다. 머크가를 대표하는 가족위원회 회장이자 지주회사 회장인 프랑크 슈탕겐베르크하베르캄프는 올해 동아비즈니스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머크의 장수 비결에 대해 “가족 구성원들이 오너라고 생각하지 않고 후대를 위해 신탁을 관리하는 신탁관리인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족이 머크에서 일하고자 할 때는 가문의 후광 없이 자신의 실력을 보일 때만 가능하다고 한다.
LG처럼 딸을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는 기업도 있는 걸 보면 대한항공이 딸을 경영자로 키우려고 한 건 진보적 태도로 보인다. 가업승계에선 딸이냐 아들이냐가 아니라 자식이 경영자로 자질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게 중요하다. 그 경영자로서의 자질이 명문대 졸업이나 막강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품성이라는 점을 일깨워준 게 ‘땅콩 회항’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