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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조진서]서번트 경제

입력 | 2014-12-25 03:00:00


조진서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라면 몇 개도 배달해주는 가게가 있었다. 거의 30년 전 얘기다. 필자가 살던 서울의 한 동네, ‘동광상회’에 전화하면 점원 형은 아파트 5층 계단을 뛰어올라와 헉헉거리며 라면을 놓고 갔다. 수고비는 따로 받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그땐 원래 그런 건 줄 알았다.

그 가게뿐 아니라 동네 많은 상점들이 젊은 직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대신 싸게 부렸다. 월급을 제대로 줬다면 인건비도 못 건질 라면 배달 같은 일을 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기자와 한 반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강원도에서 전학 온 초등학교 4학년 소녀는 오전 수업만 들었다. 오후엔 한의원에서 약재를 삶았다. 머리카락에서 쓴 냄새가 빠지지 않아 동네 아이들이 놀렸다.

고도성장 시대, 어떻게든 도시에서 발붙이길 원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덕분에 중산층과 부유층 소비자들이 혜택을 봤다. 가게마다 배달원을, 부잣집은 식모를 뒀다. 경제가 발전하고 돈 벌 기회가 많아지면서 단순 노동자들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가게 점원도 중산층으로 올라설 길이 열렸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이 그런 꿈을 잘 보여준다. 황정민이 연기한 1940년대생 남주인공은 특별한 기술 없이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돈을 모았다. 결국 번듯한 자기 가게를 차렸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를 사서 자녀도 여럿 키웠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노년기를 맞았다.

예전엔 가능했던 중산층 드림이다. 그런데 이젠 좀 힘들다. 2000년 무렵부터 양극화가 점점 심해졌다. 물가는 꾸준히 오르지만 저소득층 임금은 제자리걸음이다. 그나마 최저임금 일자리마저도 부족하다. 영화 ‘국제시장’ 세대에겐 적어도 중산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교과서가 있었다. 노동, 저축(금융투자), 그리고 부동산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저소득층에겐 노동이 유일한 선택이다. 이자율은 땅에 떨어졌고 부동산값은 넘보기 힘들 정도로 올랐다. 사다리가 끊긴 느낌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제프 포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자본주의를 ‘서번트 경제(노예 경제)’라 부른다. 국민의 일부는 다른 일부 국민의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 사회를 말한다. 서비스 노동의 가치가 하락하면 여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은 편해진다. 택배기사, 대리운전기사, 대형마트 도우미, ‘해주세요’ 같은 허드렛일 심부름을 해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반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겐 삶이 나아질 거란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양극화는 이제 개인들의 노력만으론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가 됐다. 주먹구구 경제정책도 의미 없다. 2년짜리 비정규직을 4년으로 늘려줘도 결국 비정규직끼리 밥그릇을 놓고 다투란 얘기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부의 순환이 빨리 이뤄지도록 유도하는 정책, 또 교육비와 주거비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들을 새해엔 기대해 본다.

조진서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cj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