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기 경제부 기자
일각에서는 국제유가 하락세가 지속되면서 러시아 경제가 내년 ‘디폴트(채무불이행)’에 이르게 되고 한국 등 신흥국과 산유국에서 자금이탈 도미노 현상이 나타나 세계경제가 다시 장기불황의 늪에 빠질 것이라는 위기론이 제기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러시아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이미 예상됐던 악재인 만큼 경제위기로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은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관론과 낙관론이 엇갈리는 사이 ‘음모설’도 급격히 퍼지고 있다. 국제유가 하락을 유도해 에너지 수출 비중이 높은 러시아의 경제위기 가능성을 조장해 외교 갈등을 빚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축출하려는 미국의 정치적 의도에서 이번 위기가 비롯됐다는 내용이다.
KDI는 지난달 26일 ‘일본의 1990년대 통화정책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국내에서 0%대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디플레이션 상황을 의미할 수 있다”며 디플레이션 논쟁에 불을 붙였다. 최근 1%대 초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패턴이 디플레이션에 진입하던 1990년대 초 일본과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어 “기준금리가 2.0%로 역사상 가장 낮지만 물가도 사상 최저라 실질금리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높다”며 “금리를 추가로 낮출 여지가 있고 좀 더 낮춰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한은을 겨냥했다.
이에 대해 한은은 “주장이 과하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KDI가 에너지와 식품을 뺀 내년 근원물가상승률을 2.0%로 전망하고도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한은 내에서는 KDI의 공세에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정부가 내놓은 대대적인 부양책에도 좀처럼 경기가 살아나지 않자 한은의 금리 인하를 압박하기 위해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들고 나온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경제 환경에서 두 주장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는 쉽지 않다. 미리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는 KDI나 ‘과장된 위기론’이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한은의 태도 모두 일리가 없지 않다. 하지만 날선 대립 속에 커져가는 경제주체들의 불안감이 투자와 소비 위축 등 또 다른 악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두 기관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세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