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페이스의 지퍼는 왜 길어졌을까?/필립 K 하워드 지음·김영지 옮김/256쪽·1만3500원/인물과 사상사
대표적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도 미국 정부에 납품하는 제품의 경우 황당한 기준 때문에 제대로 만들기 쉽지 않았다. 동아일보DB
온통 법과 규정의 세상이다. 법과 규정은 한번 만들어지면 십계명처럼 떠받들어진다. 문제는 그런 것이 10개가 아니라 수백만 개나 된다는 것이다. 의회는 법을 만들기만 하지 거의 없애지는 않는다.
관료들도 못지않다. 그들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규정 제정을 그들의 사명으로 생각한다. 규정집 어디를 펴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다. 사사건건 간섭한다. 그들은 그렇게 사회를 관리해야 두 발을 뻗고 잘 수 있다고 여긴다.
이 책은 뉴욕 변호사인 저자가 공무원들과 일하면서 겪은 규제 만능주의의 생생한 사례를 전한다. 예컨대 한 수녀회가 화재로 버려진 건물에 노숙자 보호시설을 조성하려고 후원금도 모으고 인력도 마련하는 등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별 필요도 없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가가 나지 않자 결국 포기한 사례 등이 나온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법과 규정의 지뢰밭을 어떻게 피해 갈 것인가부터 살핀다. 합법인가, 불법인가. 적절한 절차인가, 부적절한 절차인가. 우리는 머뭇거리고, 말을 얼버무리면서 눈치를 본다. 법과 규정은 사람에게 여유를 주지 않는다. 법 만능주의, 규제 지상주의는 사람들의 창의성과 활력 그리고 건전한 상식까지 죽게 한다. 자유와 책임이라는 민주주의 가치도 파괴되기 쉽다.
저자는 결국 인간의 자율적이고 상식적 판단과 세세한 법 규정 중 어느 것을 우선시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법은 인간의 탐욕과 오판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지만 너무 많은 법과 규정은 재앙이라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한쪽에선 규제 철폐가 선이라고 하다가 안전사고가 터지면 왜 규제가 없느냐고 갈팡질팡하는 우리 사회는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