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아버지의 말씀
정끝별(시인·이화여대 교수)
특정의 정치적 사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에 편재하는 일단면을 알레고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세 다리만 건너면 다 통한단다. 학연, 지연, 친인척, 하다못해 사돈네 팔촌까지 뒤적이다 보면 어딘가는 걸린단다. 솥단지든 술잔이든, 베개든 문고리든, 그것들을 중심으로 오고가는 ‘사바사바’와 ‘알음알음’을 얘기한 것이다. 실은 숱한 거절을 하고 거절을 당했을 내 아버지 얘기며, 거절할 권력도 없던 내 얘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다섯 해째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생을 사시다 가셨는지 다 알지 못한다. 여든 다섯 해의 아버지 삶에서 나는 그 절반을 함께했을 뿐이고, 아버지 인생 후반에 해당하는 그 절반의 절반 중 일부만을 기억할 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나는 퍼즐을 맞추듯 몇 조각의 기억과 말씀으로 아버지를 추억하고 아버지 삶을 완성해 가는 중이다.
서른 즈음이었을까 마흔 즈음이었을까. 내 얘기다. 총체적으로 다면적으로 인생 난맥이었다. 딱히 불행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늘 바빴고 늘 시간에 쫓겼다. 엄마의 입말 중 “미친 년 널뛰듯”이라는 말이 있는데, 딱 그 형국이었다. 잦은 위염과 불면과 두통이 엄습해 오곤 했다. 그 난맥의 한 뿌리가 거절하지 못한 데 있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명령이라서 거절하지 못했고 부탁이라서 거절하지 못했다. 제안이고 약속이라서 거절하지 못했고, 연대고 고백이라서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다. 거절을 못 했던 진짜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거래여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의 내가 상대에게 다시 명령하고 부탁하고 제안하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또 다시 약속하고 연대하고 고백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거절할 수 있다는 게 권력이고, 거절하는 게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걸 알게 된 건 또 언제였을까.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못하는 건 뇌물 때문이거나 뇌물스러운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는 것이 선물이다. 따뜻하되 냉정하고 부드럽되 단호한 거절, 숙고하되 여지가 없는 거절, 마음을 담은 그런 거절은 거절하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만 상대방의 깨끗한 단념을 부른다. 지지부진한, 마지못한, 어쩔 수 없는, 어영부영한 거절이야말로 돈도 잃고 인심도 잃고 사람도 잃게 한다.
아버지가 깨끗한 거절을 하시며 사셨던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전긍긍 다급해하시는 아버지를 종종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허가와 선처를 의뢰하고, 판결과 취업을 청탁하고, 진급과 지도편달을 부탁하셨을지 모른다.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이라는 아버지 말씀 속에서, 깨끗한 거절이야말로 청탁할 수밖에 없는 상대방을 덜 비루하게 하고 덜 상처 받게 하려는 배려이기도 하다는 걸 알아챈 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어떠한 거절에도 덜 상처 받으려는, 부탁하는 자의 자존심이기도 하다는 것도.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말씀은 부탁을 많이 해 본 자의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