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개봉된 영화 ‘화차’는 일본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주인공 장문호는 갑자기 사라진 약혼녀 선영을 찾다가 그의 이름, 경력, 주민등록번호까지 모든 게 다른 인물의 것임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빚쟁이로부터 시달리던 약혼녀는 선영을 살해하고 그의 인생을 가로채 살아왔다. 장문호에게 거짓 인생이 들통 날 것을 두려워한 여자는 결국 철로에 떨어져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박모 씨는 34세였던 2011년 신분을 재력가의 딸이자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의사라고 속여 남편과 결혼했다. 박 씨는 결혼하자마자 남편 차부터 외제차로 바꿔주었고 병원에선 명찰이 달린 의사 가운을 입고 다녔다.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완벽해 보이던 가족의 삶은 어느 날 박 씨가 갓난쟁이 딸과 함께 실종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실종된 아내를 추적하던 남편은 아내의 모든 삶이 거짓임을 발견한다. 결혼식 하객은 물론이고 결혼식에 왔던 신부 부모도 아내가 돈을 주고 쓴 대역이었다. 서울대 학력과 서울대병원 의사라는 경력도 거짓이었다. 더 기막힌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나가 올케인 박 씨에게 5억 원이나 되는 돈을 채권투자금으로 건넸다는 사실이었다. 가사도우미, 아파트 경비원 등 주변에서 돈을 떼인 사람이 8명이나 됐다. 박 씨는 돌려막기로 지탱하던 사기극이 한계에 도달하자 ‘화차’의 여주인공처럼 잠적해 버렸다.
▷상습적 거짓말로 사기 행각을 벌인 박 씨에게 서울중앙지법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감옥에서 딸과 함께 생활하는 박 씨는 선처를 호소하는 반성문을 여섯 차례나 재판부에 냈으나 중형을 피하지 못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고 재판에 회부된 상태에서도 사기를 친 사람이니 반성문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박 씨처럼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고 종국에는 본인조차 거짓과 진실을 헷갈리는 병리 현상을 연극성 인격장애라고 한다. ‘남을 속이려면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더니 박 씨가 딱 그런 경우인 듯하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