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주류사회 자리잡는 한인들
미국 내 한인사회의 중심 세력이 이민 1세대에서 1.5세대나 2, 3세대로 변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인사회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와 정체성 교육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25일 열린 재외한인사회연구소 창립 5주년 행사.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한국계 미국인, 즉 재미교포의 수는 2014년 기준으로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1970년(약 7만 명)의 약 29배에 이른다. 주재원이나 관광객 수를 합치면 ‘미국 내 한국인(계)’ 규모는 훨씬 더 커진다. 재미교포 사회를 연구하는 대표적 기관인 뉴욕의 재외한인사회연구소(소장 민병갑 뉴욕시립대 퀸스칼리지 석좌교수)는 최근 이런 양적 성장 못지않게 질적 변화에 주목하는 연구서를 펴냈다. 그 결론은 “미국 내 한인사회는 더 이상 이민 1세대 중심의 ‘이민자 사회’가 아니라 미국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린 ‘소수민족 사회’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어릴 때 이민 와서 미국에서 교육받은 1.5세나 미국에서 태어난 2,3세들이 한인사회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에서의 한국인 삶’이 어떻게, 얼마나 변하고 있는 걸까.
미국 인구센서스국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계 미국인은 1970년 6만9150명에서 2010년 170만6822명으로 늘었다. 미국지역사회조사(American Community Surveys)는 최근 한국계 미국인 중 1세대(16세 이상일 때 이민)는 55.4%, 1.5세대(한국에서 태어난 뒤 15세 이하일 때 이민) 20.7%, 2세대 이상(미국에서 출생)은 23.9%라는 통계를 내놓았다.
재외한인사회연구소는 “2014년을 기준으로 한국계 미국인이 200만 명을 초과했고, 1.5세대 와 2세대 이상의 합산 비중도 1세대와 비슷하거나 넘어섰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한인사회의 성장과 진화를 이끈 건 특유의 교육열이었다. 1세대의 대졸자 비중은 55.9%였지만 1.5세대 65.3%, 2세대 이상 70.5%로 높아졌다. 미국 전체의 대졸자 비중 28.2%보다 훨씬 높다. 민 교수는 “1.5세대와 2세대는 미국 교육을 일찍 받아 주류사회에 많이 진출하게 됐다” 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의 직업 분포에서 자영업이 줄어들고 공직이나 관리직, 전문직, 기술직이 늘어나는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1세대의 28.4%가 자영업에 종사했지만 2세대 이상에선 8.9%뿐이다.
뉴욕에 사는 K 씨(60)는 “이민 1세대로서 좋은 직업을 갖는 데 한계가 있다. 나는 한인을 상대로 하는 자영업을 하고 아내도 식당 서빙 같은 일을 주로 해왔다. 그러나 아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맨해튼의 금융기관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녀에게 ‘영어 실력 안 느니까 한국 아이와 놀지 말라’는 이민 1세대 부모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 삼성 현대자동차 LG 같은 글로벌기업들의 활약, 특히 최근 케이팝과 한류(韓流) 열풍으로 ‘한국은 자랑스러운 모국’이란 인식이 강해졌다. 요즘은 2, 3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한인사회의 한결같은 얘기다. 미국 내 1000여개 한글학교를 총괄하는 재미한국학교협의회(NAKS)의 최미영 총회장(50)은 “미국에서는 유대인처럼 뿌리 교육, 정체성 교육을 잘 받은 소수민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확률도 훨씬 높다”고 말했다. 이민자 연구계에선 ‘영어밖에 모르고 민족 정체성도 약한 아이보다 이중 언어(영어와 모국어)를 구사하고 민족 정체성도 강한 아이의 학업성적이 훨씬 더 우수하다’는 보고서가 나와 있다. 최 총회장은 “한글학교에 다니는 2, 3세에게 한글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를 같이 가르치면 ‘내가 한국 역사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의식이 높아져 학업 성취도도 올라갔다”고 강조했다.
9세 때 미국에 건너온 컬럼비아대 대학원생 케이리 문 씨(26)는 “미국 사회에선 ‘자신의 뿌리를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미국 내 한국어 교육은 일반 미국 학교에서 한국어를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도록 하는 운동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한인유권자운동을 꾸준히 벌여온 시민참여센터는 미국 중간선거 때 ‘8080캠페인’을 벌였다. 한인의 유권자 등록률 80%, 투표 참여율 80% 달성이 그 목표였다. 뉴욕과 뉴저지의 경우만
해도 한인 유권자 등록률은 51∼53%, 투표 참여율은 37∼40% 정도였다. 반면 유대계는 등록률 90%, 참여율 96%였다.
한국계 연방하원의원이 김창준 전 의원(75·공화·캘리포니아·1992∼1998년) 이후 나오지않는 것도 정치 참여 부족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한인 관계자들은 “33세의 로이 조 변호사가 지난 선거에서 뉴저지의 6선 거물(스콧 개릿 공화당 의원)의 벽을 결국 넘지 못했지만 많은 한국계 젊은이들이 ‘나도 정치에 도전할 수 있다’는 꿈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한 한국계 검사는 “더 많은 한국계 미국인이 정계나 공직에 진출해야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계 2세 이상의 직업 분포에서 공직자가 12.8%(2011년 기준)인데 중국계는 16.8%, 일본계는 23.6%에 이른다.
재외한인사회연구소는 ‘재미 한인사회에 힘을 실어준 한인들’이란 시리즈 도서를 내면서 그 첫 대상자로 정치인 또는 공공분야에서 일하는 18명을 선택한 것도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다.
재외한인사회硏 민병갑 교수
미국 뉴욕시립대 퀸스칼리지 민병갑 석좌교수(72)는 1972년 미국 유학을 왔다가 정착한 이민 1세대다.
2009년 설립된 재외한인사회연구소는 그의 40여 년 공부 인생이 집결된 곳이다. 민교수는 최근 “한인 사회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한인연구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고 말했다. 한 재미 사업가가 그의 염원을 우연히 알고 20만 달러(약 2억2000만 원)를 내놓으면서 이 연구소가 탄생했다.
민 교수는 “유대계 미국인들이 다른 백인 집단보다 사회 경제적 성취수준이 더 높고, 동시에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성공적으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도시의 주요 대학마다 유대계 미국인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유대인연구소나 관련 연구프로그램이 설치돼 있는 것은 민족 정체성의 계승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9월 25일 이 연구소의 창립 5주년을 기념하는 만찬 행사가 그의 대학 교내에서 열렸는데 참석자들은 민 교수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다. 마토스 로드리게스 퀸스칼리지 총장은 “민 교수와 연구소 덕분에 한국계 미국인의 목소리를 보다 분명하게 들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곳이 지역구인 크레이스 맹 연방하원의 원도 “(민 교수 덕분에) 한국계 미국인과 그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더 많이 할 수 있게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13일 미국 뉴욕 플러싱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한인 저자들. 왼쪽부터 김동석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 김영덕 한국어정규과목추진위 회장, 론 김 뉴욕 주 하원의원, 수전 신 앙굴로 뉴저지 체리힐 시의원.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한민족 정체성 찾기 시작한 재미교포들
지난해 11월 13일 저녁 미국 뉴욕 플러싱의 한인커뮤니티서비스(KCS) 회관. 재외한인사회 연구소가 발간한 ‘재미 한인사회에 힘을 실어준 한인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한국계 미국인1세대, 1.5세대, 2세대가 함께 모였다.
이 책의 공동 저자 가운데 김영덕 한국어정규과목추진위 회장(80), 김동석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56), 수전 신 앙굴로(신소영·44) 뉴저지주 체리힐 시의원, 론 김(김태석·34) 뉴욕 주 하원의원도 참석해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가 투영된, 살아온 얘기를 직접 들려줬다.
김 회장은 일제강점기 북한에서 태어났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1947년 남한에 내려온뒤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김 회장은 1976년 현대그룹에 입사하면서 한국으로 다시 유턴했다. 1997년 한국에서 은퇴한 그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과 뉴저지 지역의 미국 한국상공회의소 등에서 일했다. 그는 “성공적인 한인 사회를 만들려면 조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상임이사는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운동권 학생’ 출신이다. 한국 사회의 폐쇄성에 염증을 느끼고 198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1990년 뉴욕 브루클린 레드애플 한인 청과상 흑인불매운동 시위사건 등을 통해 ‘한인사회 풀뿌리운동가’로 정착했다. 그는 “흑인 데모꾼들이 한인 상가를 초토화시켰는데도 변변한 보상을 못 받았다”며 “이 사건이 나를 사회정치적으로 아주 냉정하게 철들게 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한인들이 살아남으려면 더 이상 백인 흉내내지 말고 소수계 이민자임을 명확히 하고 정치적 사회적 보호막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요즘 ‘한국판 AIPAC(공공정책협의회) 만들기’에 다걸기하고 있다. AIPAC는 재미 유대인 로비단체다.
수전 신 의원은 4세 때 미국에 와 16세 때 귀화해 미국 시민이 된 뒤 28세 때 미국인과 결혼했다. 전형적인 1.5세대라고 할 수 있다. 2009년 그는 뉴저지 주 선출직에 당선된 최초의 한국계 여성이다. 신 의원은 “나 자신을 먼저 한국인이라고 여기고, 그 다음에 미국인으로 생각하지만 두 개의 문화를 모두 포용하고 내 아이들에게도 두 문화를 모두 전해줄 방침”이라고 말했다.
론 김 의원은 뉴욕 주의 첫 선출직 한국계다. 그는 7세 때 미국으로 왔다.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초중고교와 대학을 모두 미국에서 나왔다. 그는 “작은 채소가게를 하던 부모님은 외아들인 나에게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휴가 한 번 없이 1년 365일 쉬지 않고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야) 열심히 일하는 문화가 한국인 특유의 인내와 끈기, 투지의 역사적 산물이란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김 의원의 의정 활동이 학생들의 학업성취 격차 해소, 소상인 보호에 집중돼 있는 건 부모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