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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진단]‘땅콩 회항’과 견제구

입력 | 2015-01-05 03:00:00


송진흡 산업부 차장

“미국 최고경영자(CEO)처럼 큰 성과를 내거나 취임했을 때 대형 크루즈 여객선을 통째로 빌려 성대한 파티를 하고 싶습니다. 유명 악단과 연예인도 부르고….”

몇 년 전 사석에서 만난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농담 삼아 한 말이다. 이 자리에서 박 회장은 “폼 나게 살려고 돈을 버는 것 아니겠느냐”며 미국 CEO들에 대한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중국이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후진국 CEO들은 더 부러운 생활을 한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그는 곧바로 “한국에서 이런 파티를 했다가는 비난 여론 때문에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며 “보는 눈이 많은 한국에서는 이런저런 ‘견제구’가 많다”며 아쉬워했다.

박 회장이 얘기한 것처럼 한국 사회에는 대기업 오너에 대한 견제장치가 종종 작동한다. 평등의식이 강한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대기업 오너가 ‘오버’를 하면 여지없이 견제구가 날아든다. 대기업 오너라는 이유로 비난을 더 받는 등 역차별 사례도 적지 않다. 대기업 오너들 사이에서 “차라리 탄탄한 중견기업 오너로 사는 게 더 행복할 것”이라는 푸념이 나올 정도다.

최근 발생한 ‘땅콩 회항’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오너에 대한 견제 장치가 완벽하게 작동한 대표적인 사례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일탈 행위가 드러난 후 비난 여론이 들끓으면서 검찰과 법원까지 나섰다. 견제 장치가 전방위로 작동한 셈이다.

재계에서는 이번 사건이 반(反)기업 정서를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기업 오너의 ‘제왕적 리더십’이 민낯을 드러내면서 기업이나 기업인에 대한 반감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장기적으로 한국 자본주의를 성숙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기업 오너들에게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불필요한 사회적 마찰 요인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사건 이후 대기업 오너들이 조심스러워졌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다. 2세나 3세들에게 신중한 처신을 주문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중견 및 중소기업 오너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 불똥이 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제왕적 리더십보다는 소통형 리더십으로 돌아선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땅콩 회항 사건 이후 오너들 사이에서 ‘한번 찍히면 끝장이 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며 “임직원이나 협력업체 대표 등 ‘을’을 대하는 태도도 예전에 비해 부드러워졌다”고 귀띔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인 빌 게이츠는 상속세 강화 등 부자에 대한 증세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부(富)의 불평등이 심각해지면 사회 구성원의 경제적 동기를 약화시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눈앞에 보이는 돈보다는 장기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하는 게 낫다고 본 것이다. 판을 깨지 않겠다는 얘기다. 사회적인 견제구가 날아오기 전에 선수를 쳤다고도 볼 수 있다.

땅콩 회항 사건을 계기로 모처럼 자숙 모드에 들어간 국내 대기업 오너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야구에서 진루를 위해 베이스에서 많이 떨어지면 언제라도 견제구에 걸려 ‘아웃’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송진흡 산업부 차장 jinh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