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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죽

입력 | 2015-01-05 03:00:00



―강기원(1957∼ )

죽집에 간다
홀로, 혹 둘이라도 소곤소곤
죽처럼 조용한 사람들 사이에서
죽을 기다린다
죽은 오래 걸린다 그러나
채근하는 사람은 없다
초본식물처럼 그저 나붓이 앉아
누구나 말없이 죽을 기다린다

조금은 병약한 듯
조금은 체념한 듯
조금은 모자란 듯
조그만 종지에 담겨 나오는 밑반찬처럼
소박한 어깨들

죽집의 약속은 없다
죽 앞의 과시는 없다
죽 뒤의 배신도 없을 거라 믿는다
고성이 없고
연기가 없고
원조가 없고
다툼이 없는 죽집
감칠맛도 자극도 중독도 없는
백자 같은, 백치 같은 죽

무엇이든 잘게 썰어져야
형체가 뭉개져야
반죽 같은 죽이 된다
나는 점점 죽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요지를 이빨 사이에 낀 채 긴 트림을 하는
생고깃집과 제주흑돼지 오겹살집 사이에서
죽은 듯 죽집은 끼어 있다
죽은 후에도 죽은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죽은 ‘곡식을 오래 끓여서 알갱이가 흠씬 무르게 만든 음식’이다. 입맛을 돋우고 영양가를 높이기 위해 소고기니 닭고기니 전복이니 버섯이니 굴이니,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먹을 사람의 식성에 따라 다른 재료를 더 넣기도 한다. 뭉근한 불에 놓고 지켜보면서 끓어 넘치거나 눋지 않도록 가끔 저어주며 만드는, 시간과 정성이 듬뿍 들어가는 죽. 그걸 알기에 죽집에서 ‘채근하는 사람은 없다’. 솥에서 사발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냄새와 훈김 속에서 ‘나붓이 앉아’ ‘말없이 죽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성정은 죽처럼 순할 테다. ‘조금은 병약한 듯/조금은 체념한 듯/조금은 모자란 듯’ 보이기도 하는 그 순함.

뜨거울 때 먹어야 제맛인 죽은 푹푹 떠먹을 수 없다. 한 숟가락씩 떠서 호호 불어가며 조심스레 입에 넣으면 모든 재료가 어우러져 푹 퍼진 죽이 혀에 감긴다. 그 맛에 죽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소화불량이거나 치아가 부실하거나 식욕이 없는데 무얼 먹긴 먹어야겠는 사람들이 죽을 찾는다. 화자는 죽이 좋아 죽집에 간 게 아닌 듯하다. 이빨을 가진 포유류의 ‘씹는 맛’을 만끽하는 ‘고깃집’ 사이에 ‘죽은 듯 끼어 있는 죽집’에서 화자는 ‘점점 죽이 되어가는 느낌이’란다. 어딘지 아픈 듯한 사람들, 삶의 전장에서 한 발 물러난 듯한 사람들이 한 사발 죽을 기다리는, 쓸쓸하고 평화로운 죽집…. 죽집 안팎 풍경과 죽의 속성을 삶에 대한 성찰로 뭉근히 이끄는 시어들이 깔끔하고도 씹을 맛이 난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