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우경화 견제 日야권 새 희망
공산당은 달랐다. 의석을 8석에서 21석으로 늘리며 원내 제5당으로 올라서면서 1996년 이후 18년 만에 비례대표뿐 아니라 지역구 당선자까지 배출했다. 정작 당황한 건 공산당. 비서관 사무원등 50명 직원을 급히 구한다는 구인 광고까지 서둘러 내야 했을 정도였다.
공산당 돌풍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도 의석을 6석에서 11석으로 늘렸으며 같은 해 6월 도쿄 도(都)의회 선거에서는 8석에서 17석으로 늘렸다. 일본 야당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는 중심인물이 바로 시이 위원장이다. 1990년 7월 35세 나이에 당 중앙위원에 뽑혔고 38세에 중의원 배지를 단 뒤 지금까지 8선의 경력을 쌓았다. 2000년 위원장에 선출됐다.
2012년 말 2차 아베 정권이 들어서자 시이 위원장의 돌직구는 더 강해졌다. 지난해 7월 집단적 자위권이 용인됐을 때에는 “헌법 파괴 쿠데타라 할 만한 폭거”라고 맹비난한 데 이어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대해 “일본이 침략 전쟁을 미화한다는 것을 세계에 선언한 행위”라고 했다. 일본 우익들과 일부 누리꾼들은 이런 그를 ‘반일’ ‘매국노’ ‘미치광이’라 몰아붙이지만 시이 위원장의 인기는 높아지고 있다.
일본 공산당의 전성기는 1970년대. 1979년엔 중의원 의석이 41석이나 될 정도였지만 80년대 사회주의권 몰락과 소선거구제 도입 등으로 당세가 꾸준히 쇠락해 왔다. 당원 수도 1990년 50만 명에서 30만5000명까지 줄었지만 최근 들어 매달 1000명씩 늘고 있다. 비결은 뭘까.
우선은 일본 내 아베 우경화에 대한 견제 여론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 대다수 야당이 당 방침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상황이라 유일한 브레이크는 공산당뿐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에는 요즘 당원이 아닌데도 국민적 명성을 얻고 있는 대중 스타들의 인터뷰가 실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인기 배우 니시다 도시유키(西田敏行), 여배우 후지와라 노리카(藤原紀香)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인사들이 줄줄이 나와 ‘반전(反戰)’을 외친다. 원로 여배우 이치하라 에쓰코(市原悅子·79)는 최근 인터뷰에서 “전쟁을 하면 착한 아버지도 괴물이 된다. 전쟁이 시작되면 누구도 ‘반대’를 말하지 못하니 그 전에 해야 한다”고 했다.
공산당 부활의 두 번째 비결은 다름 아닌 ‘경제’. 아베노믹스가 서민 경제를 악화시키면서 격차만 확대시켰다는 시이 위원장의 주장은 특히 젊은층에게 먹히고 있다. 2008년 2월 시이 위원장이 국회에서 날품팔이 파견노동자의 실태를 지적한 동영상은 ‘시이 잘했어’라는 뜻의 ‘시지제이(CGJ·시이 Good Job)’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아직도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공산당이 내걸고 있는 비정규직 차별 해소, 잔업시간 상한 제정, 일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 금지, 최저임금 대폭 인상 같은 정책이 공감을 얻고 있는 한편에 복지 확대, 부자 증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나 원전 반대에 대해서는 ‘포퓰리즘’이라는 비판도 높다. 하지만 성장 일변도로 치닫는 아베 정권에 대한 ‘주의 환기’ 효과가 있다는 여론이 지지층을 넓히고 있다.
투명한 당 운영도 기존 정치권의 부패에 신물 난 유권자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기업 지원금은 물론 국민세금인 정당 보조금도 받지 않는다. 오로지 당비(黨費)와 기관지 구독료, 후원금으로만 재정을 충당하고 있다. 한편 투쟁적인 활동가 이미지와 달리 남다른 클래식 애호가로 유명하다. 고교 때에는 작곡가가 되고 싶어 공부를 따로 했을 정도이고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 실력도 수준급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 때 사귄 아내와 1979년 결혼해 딸 하나를 두고 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