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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칼럼]광복 70년, 성공의 역사와 그 이면

입력 | 2015-01-06 03:00:00

세계 9위 교역 규모…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육박
지구촌 중심에 다가선 대한민국
그러나 반공-성장 강조되며 가치관 혼란 큰 부작용 초래
효율적이었던 권위주의 체제는 국가 통치역량 약화시켜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교수

자주 가는 작은 칼국숫집이 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이 신문사를 했던 집이다. 광복 전후 지도자들의 애환이 고여 있는 집, 이 집을 그냥 이렇게 둬도 되나? 드나들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들곤 한다.

언젠가 주인에게 말했다. “선생의 글이라도 하나 복사해 걸어두시지.” 주인이 손사래를 쳤다. 선생과 관련해 이 집이 잠시 TV에 비친 적이 있는데, 그 후 사람들이 몰려와 ‘빨갱이 집’ 어쩌고 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단다. 막걸리 한 잔이 확 넘어갔다. 그래, 우리 역사가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올해가 광복 70주년. 그 역사가 자랑스럽다. 1인당 3만 달러를 바라보는 국민소득에 세계 9위의 교역 규모, 5000년 역사에 이만큼 세계의 중심에 다가간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이 자랑스러운 역사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흔히 말하는 인권탄압이나 빈부격차 같은 과거와 현재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일종의 원죄가 되어 미래로 향한 우리의 발길을 잡는 문제들도 있다.

먼저 가치관의 혼란이다. ‘반공’과 ‘성장’ 같은 가치가 강조되는 가운데 다른 많은 중요한 가치들이 희생됐고, 그로 인해 가치관에 큰 혼란이 생겼다.

‘반공’부터가 그렇다. 몽양 선생과 같이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좌익이나 아나키스트였다는 이유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반면 친일 인사들은 득세를 하고 그 부와 권력을 세습했다. 정의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누구에게도 바르게 살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됐다.

‘성장’ 역시 마찬가지다. 성장을 위한 일이면 무엇이든 용납됐다. 재벌은 각종 특혜를 받았고, 죄를 지어도 쉽게 용서됐다. 반면 근로자와 시민의 정당한 권리는 억압됐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국민 개개인의 가치관이 곧 국가의 건강성과 경쟁력을 결정하는 혁신주도형 민주사회가 돼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큰 문제가 있다. 권위주의 체제가 불러온 국가 통치역량의 약화다. 한때 이 문제에서 더없이 효율적이었던 권위주의 체제는 역설적으로 국가의 통치역량을 극단적으로 떨어뜨려 놓았다. 그 결과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우선, 정치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한쪽으로는 권력자를 따르는 충성분자를, 또 다른 쪽에서는 그에 반하는 저항적 지도자를 양산하는 배경이 됐다. 양쪽 모두 새로운 시대를 위한 대안이나 정책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 이들과 그 아류의 인사들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한계가 뚜렷한 국회의 기능을 끝없이 떨어뜨리고 있다.

관료조직도 그렇다. 절대권력 아래에서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에 취해 정작 해야 할 혁신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절대권력이 사라진 지금 관료사회는 그야말로 복지부동이다. 꼬이고 꼬인 법령과 지침, 그리고 왜곡된 조직문화 등이 온통 지뢰밭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질 낮은 정치에 무능한 국회,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관료조직. 이 속에서 제대로 된 대통령인들 나오겠나. 또 나온다 한들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누가 대통령이 되건 말이다.

결론적으로 대통령도 국회도 관료조직도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풀 능력이 없다. 갈등조정 능력 또한 마찬가지다. 그 결과 세상은 힘의 논리를 따라간다. 있는 자는 더 가지고, 없는 자는 있던 것도 빼앗긴다. 양극화 등 사회경제적 모순은 심화하고 냉소와 갈등은 그 극을 향해 치닫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은 국민들이 메시아를 기다린다.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싹 평정해 주었으면 한다. 영화 ‘명량’이나 ‘국제시장’의 열기도 그런 것 아니겠나. 그러나 그것은 답이 아니다. 권위주의에 따른 문제만 겹쳐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따로 있다. 먼저 이 자랑스러운 역사의 양면을 다 이해하는 일이다. 그 속에 모순이 있음을, 또 그 모순이 오늘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모두 인정하자는 말이다. 그래야 우리 서로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있다.

그 다음 이러한 모순에 대한 깊은 반성과 고민을 통해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치와 거버넌스 구조를 찾아내어야 한다. 광복 70년을 맞는 해의 숙제다. 풀지 못하면 자랑스러운 역사는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오늘 마침 동아일보가 선진사회로의 과제를 놓고 심포지엄을 연다. 이 또한 지켜볼 일이다.

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교수 bjkim36@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