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핑촌 거쳐 탈북한 주성하 기자가 본 참극
주성하 기자
이번 사건 소식을 듣고 기자는 10여 년 전 목숨을 걸고 북한을 빠져나온 탈북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안내인의 재촉 속에 대낮에 무릎 깊이의 두만강을 전력 질주해 건너던 기억, 난핑 뒷산에 올라 북한 쪽을 바라보며 안도하는 한편으로, 과연 내 운명이 어찌 될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밤을 기다리던 순간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어둠이 깔리고 주위가 어두워진 뒤 기자는 난핑 마을로 내려와 미리 소개받은 집을 찾으려 돌아다녔지만 수십 채의 농가가 비슷비슷하고 문패마저 없어 찾기 어려웠다. 할 수 없이 어느 민가에 들어가 “이러이러한 집을 찾고 있다”고 했더니 집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친절하게 알려줬다. 기자가 탈북자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조선족 마을이라 한국말로 통할 수 있었다.
할 수 없이 산길을 타고 걷다가 산에서 노숙을 하고 다음 날 저녁까지 걷고 또 걸었다. 너무 배고파 외딴 집으로 들어가 “탈북자이다. 먹을 것을 좀 줄 수 있느냐”고 하자 집주인인 한족 남자가 직접 된장찌개를 끓여 주었다. 그때만 해도 옌볜의 민심은 탈북자들에게 비교적 동정적이었다.
기자는 두만강을 다섯 번이나 건너고 탈북에 성공했다. 처음 강을 건넜을 때 허룽 시내에서 중국 공안에게 체포됐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서글서글한 눈매였던 공안은 조사를 마친 뒤 내게 “김일성대 졸업생이라고? 그러면 우리 베이징대 졸업생이나 마찬가지”라며 “인재가 북에 끌려가서 죽는 걸 바라지 않아 풀어주니 다시는 잡히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금 북-중 국경의 민심은 기자가 탈북할 때와는 판이했다. 국경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됐고, 집집마다 비상신고 전화가 지급돼 있다. 이웃 주민들이 탈북자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일을 겪은, 그 인심 좋던 난핑 촌 주민들은 앞으로 탈북자를 보면 분노하지 않을까.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넌 탈북자들 역시 살기 위해 더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북-중 국경의 이 같은 현실은 통일에 대한 장밋빛 꿈에 대한 경종일지도 모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