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49세 때 서울 종로구 창신동 자택 겸 작업실에 앉은 ‘국민화가’ 박수근(위 사진). 미군 초상화를 그려 모은 35만 환으로 마련한 이 집 마루에서 서민적 주제를 회갈색 주조로 표현한 화풍이 갖춰졌다. 아래는 1976년 독일 쾰른예술협회에서 전시된 ‘TV 로댕’ 옆에서 포즈를 취한 44세 때의 백남준. 동아일보DB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일대에 ‘박수근 백남준 예술문화 거리’ 조성이 추진된다.
7일 미술계에 따르면 창신동 393-16번지(지봉로 11) 박수근의 옛 작업실 터와 197번지(종로53길 21) 주변의 백남준 생가 터를 중심으로 이 지역을 토대 삼아 자생한 예술문화 인프라를 통합 구축해 지원하는 방안이 서울시 안팎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박수근(1914∼1965)과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이 생활했던 공간을 두 축으로 삼아 새로운 예술문화 기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시발점은 5월 6일 박수근의 50주기를 전후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릴 대규모 기념전이다. 박삼철 서울디자인재단 DDP기획본부장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박수근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갤러리현대를 주축으로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의 도움을 얻어 박 화백의 대표작 50점을 선별해 전시할 계획”이라며 “이것이 단지 전시실 안에서의 단발성 행사로 그치지 않고 한국 예술문화의 항구적 버팀목을 이루는 계기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미술, 건축, 문화재 등 문화계 각 분야 인사들이 활발히 물밑 작업을 펼치는 중”이라고 말했다.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은 “박수근과 백남준은 한국에서뿐 아니라 글로벌 문화예술계에 커다란 이정표로 작용할 수 있는 높은 가치의 아이콘”이라며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공간의 문화적 역사를 다시 돌아볼 수 있게끔 정돈하는 것만으로도 상상 이상의 파급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승효상 서울시 총괄건축가도 “창신동은 예술적 유산이 도시의 일상과 융합해 품격 높은 문화적 가치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종로53길 21) 주변 백남준의 옛집 터 모습. 한국 최초의 재벌로 불린 부친 백낙승의 저택은 미미한 자취조차 남아 있지 않다.
박수근은 6·25전쟁 중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창신동에 판잣집을 마련해 거처 겸 작업공간으로 삼았다. 거상(巨商)의 아들로 태어난 백남준은 6∼18세 때 이곳에 살았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인터뷰에서 “창신동에 가고 싶다. 집은 불타 없어졌지만…”이라고 말했다.
박수근의 옛집은 국밥집으로 변했다. 2013년 간판 발치에 붙여진 검은색 표지판이 한국 현대회화 거장의 작업공간을 기억하는 장치의 전부다. 총면적이 9900m²(약 3000평)나 됐다는 백남준 생가 터는 교회, 단층 가옥, 상가 건물로 빼곡히 채워졌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393-16번지(지봉로 11) 박수근의 옛 작업실 터. 국밥집 간판 아래 붙은 표지판이 싸리비에 가려져 잇다. 손택균 기자
전문가들은 “문화와 산업적 가치를 아울러 고려한 긴 안목의 체계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철거와 신축을 통한 부동산 개발보다는 지역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공간재생 노력이 주효하리라는 것. 2013년 뉴타운 지구에서 해제된 이 지역은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을 겪으며 서울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도가 심해졌다.
낡은 봉제공장과 문구상가 사이로 자생한 소규모 갤러리, 각종 공방, 카페거리를 묶으면 새로운 형태의 문화예술기지를 형성할 잠재력을 얻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창신동 곳곳에는 봉제공장에서 얻은 자투리 천으로 생활소품을 제작하는 디자인회사, 거리 특유의 분위기를 인테리어와 소품 디자인에 반영한 카페가 속속 생겨났다. 젊은 디자이너와 숙련된 봉제인력을 연결하는 프로젝트와 관련 세미나도 이어지고 있다.
신중진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는 “창신동 남서쪽에 맞닿은 DDP를 기점으로 삼아 ‘서민 화가’ 박수근과 ‘엘리트 아티스트’ 백남준을 지역의 상징으로 내세운다면 현재진행형의 젊은 예술문화 움직임이 무시 못할 잠재력을 드러낼 것”이라고 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