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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강성학]대일외교, 용기보다 지혜가 필요할 때

입력 | 2015-01-08 03:00:00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국제정치학

우리는 지독히 악화된 한일관계의 모든 책임이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극우적 망동’에 있다고 보고 그가 사라지면 일본의 대한정책이 근본적으로 전환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아베 정권의 반역사적 대외정책 기조는 분명히 보편적 인류애의 윤리에 반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정치지도자로서 ‘일본의 국가이익’을 보다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자세로 추구하고 있다. 아쉽게도 이것이 일본 국민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 또한 최근 그의 재집권으로 입증됐다.

악화일로의 한일관계에 우리 정부가 일부 책임이 있다는 사실도 지적돼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인정과 진정성 있는 해결책을 우선적으로 요구했고 이 고결한 도덕적 요구가 모든 한일관계의 전제조건이 돼버렸다.

근대 국제정치학의 아버지 한스 J 모겐소는 일찍이 외교의 근본적 규칙들 중 하나로 “체면을 잃지 않고서는 후퇴할 수 없는, 그리고 중대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전진할 수 없는 그런 위치에 결코 자신을 두지 말라”고 가르쳤다.

모겐소가 제시한 또 하나의 규칙은 “국가는 자신에게 치명적이지 않은 모든 쟁점들에 관해서 기꺼이 타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베 정부의 부당한 정책으로 초래된 반일적인 국민적 여론이 큰 정치적 부담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모겐소에 따르면 정부는 ‘여론의 노예가 아닌 리더’가 돼야 한다.

한일 양국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양국관계가 단절된다면 상대적으로 높은 민감성과 취약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한국의 불리한 입지가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이른바 ‘아시아로의 선회(Pivot to Asia)’ 전략을 채택함에 따라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급부상했다. 미국의 대아시아 동맹정책의 핵심은 안타깝게도 한국이 아니라 일본인 것이다.

미국에 한국은 아시아 대륙을 향한 지정학적 교두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을 잃는다면 태평양 전체가 위태로워져 미국 안보에 아주 치명적이다.

일본인들의 ‘사무라이 정신’과 한국인의 ‘선비 정신’은 타협하는 것을 큰 수치로 간주한다. 하지만 사무라이에겐 용기가 최고의 덕목이지만 선비에겐 지혜가 최고의 덕목이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는 올해 초에 지혜롭게 일본에 타협의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 국가이익을 위한 외교가 아닐까 생각한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