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되는 해에도 여전히 외면당하는 20세기 최고의 한국 시인 “내 잘못 ‘우수리’도 ‘에누리’도 없이 처벌해 달라” 친일 놓고 치고받으면 누가 좋아할까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서정주는 1970년 이 집으로 이사와 2000년 타계할 때까지 꼬박 30년을 살았다. 집은 관악산 산비탈의 축대 위에 변함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사당동 493번지 예술인마을 A5의 15’라고 쓰인 문패도 그대로였다. 홀로 옛 모습을 잃지 않은 채 그야말로 ‘인고(忍苦)의 세월’을 버텨준 시인의 집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는 한국의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000여 편의 많은 시를 남기면서 한국인의 시심(詩心)을 한껏 고양시켜 준 인물이다. 우리말을 그보다 더 아름답게 수놓고, 우리의 문학적 정서를 그보다 더 풍요롭게 해준 시인은 없었다. 그러나 요즘 학생들은 그의 시를 배우지 않는다. 간혹 그가 남긴 친일(親日) 시로만 접할 뿐이다.
서정주가 일제 말기 친일 시를 발표한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다. 시인도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로 일본 지배가 오래갈 것으로 알고 판단 착오를 했다’고 인정했다. 그가 쓴 친일 시는 4편, 산문까지 합하면 총 10여 편이다. 이를 놓고 ‘친일파의 거두’ ‘완벽한 친일파’라며 돌을 던지는 것은 과도하다. 심지어 광복 이후인 1947년에 발표한 그의 ‘국화 옆에서’를 놓고도 “국화는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이라며 일왕을 찬양하는 작품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서정주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천재 영화인 나운규(1902∼1937)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운규는 남북한 모두에서 ‘민족 영화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 북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를 넘어서’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화인이다. 이 책에는 “나운규 등은 ‘아리랑’을 비롯한 민족적 향취가 강한 영화들을 제작하여 우리나라 예술인의 실력을 과시했다”고 적혀 있다.
그를 ‘스타’로 등극시킨 작품은 1926년 개봉한 무성영화 ‘아리랑’이다. 이 영화에서 나운규는 감독 주역 원작 각색을 모두 맡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신화적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개봉 당시 기록을 보면 감독은 나운규가 아닌 일본인 쓰모리 히데카쓰였다. 제작회사도 일본인이 세운 ‘조선키네마’로 기록되어 있다. 나운규는 서정주와는 반대로 실제보다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두 천재 예술가 모두 민족예술의 길을 걸었음에도 평가가 갈리게 된 것은 서정주의 경우 일제 말기를 살았고, 나운규는 그 이전에 세상을 떠난 이유가 크다고 생각한다. 나운규는 일제가 전쟁 체제로 돌입하고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강화하기 전인 1937년에 35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나운규 개인에게는 불운이었지만 일제의 친일 요구에서 차단되면서 영원한 생명력을 얻는다.
서정주는 생전에 “나의 실제 이상으로 눈감아 주는 어느 우수리도, 나의 실제보다 얕잡아보는 어느 에누리도 나는 절대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저질렀던 친일 행위만큼의 처벌을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의 소원대로 일제 시대를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냉정함을 얻을 수 있을 때 우리에게 극일(克日)도 완성된다. 광복 70년이 그 실마리를 푸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