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씨는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컴퓨터 3D 디자인 업체 부장, 강남 11억 원대 아파트 보유, 혼다 어코드 보유’라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던 모양이다. 3년 전 사오정의 나이에 실직한 뒤 아파트를 담보로 5억 원을 대출받아 매월 400만 원씩 아내에게 생활비로 준 것도, 고시원을 오가며 출근하는 행세를 한 것도, 아내가 실직을 눈치챈 뒤에도 딸들에게 계속 비밀로 한 것도, 동창회비로 매년 30만 원을 낸 것도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그는 실직을 만회해보려고 주식투자를 했으나 2억7000만 원을 날렸다. 그의 진짜 위기는 주식투자 실패로 직장을 계속 다니는 척하는 것조차 힘들어진 상황에서 왔다. 딸들에게도, 양가 부모들에게도, 동창들에게도 숨길 수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는 유서에 ‘막판에 왔다’고 썼다. 실직 상태에서의 2억7000만 원 손실은 대단히 큰 것이지만 막판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것이다. 11억 원의 아파트를 팔아 5억 원의 대출을 갚고 통장 잔액 1억3000만 원을 보태면 그에게는 아직도 7억3000만 원이 남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