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배기 수형(가명)이는 태연해 보였다. 닷새 전 고모를 목 졸라 살해한 친형(14)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한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위로의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어른들에게 수형이는 “괜찮아요. 고모랑 저는 나중에 천당에서 만날 테니까요”라며 먼저 말을 건넸다. 아직 목에 남은 벌건 손자국과 어울리지 않는 밝은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지난해 12월 초 경북의 한 아동보호시설에서 수형이를 처음 만난 범죄피해자지원센터 관계자의 기억이다.
오랫동안 범죄 피해자들을 지원해온 이 관계자는 수형이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사건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억누른 채 방치하면 성장 과정에서 폭력적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수형이는 몇 해 전 끔찍한 사건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뒤에도 한 번도 심리 상담을 받은 적이 없었다.
수형이가 치료를 받기까지는 많은 장벽이 있었다. 피해자 심리 치료시설 ‘스마일센터’는 서울 등 전국 6곳에 불과하다. 일반 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치료를 받으면 필요한 경비를 먼저 자비로 부담한 뒤 피해자지원센터와 검찰청에 각각 신청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수형이처럼 보호자를 잃은 피해자는 2개월 이상 걸리는 후견인 선임 재판 기간 동안 보호시설에 ‘일시보호’ 형태로 기거해야 해 치료 지원 대상에서 아예 제외된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범죄 피해자와 유가족이 좀더 쉽게 심리치료 등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법무부는 개정된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이 올해부터 시행돼 지난해 594억 원이었던 기금이 915억 원으로 늘었다고 7일 밝혔다. 가해자를 대신해 국가가 지급하는 피해자구조금도 1인당 최대 6865만 원에서 9100만 원으로 늘었다. 치료비는 치료를 받은 뒤에 지불할 수 있게 되고, 지원금 지급 창구도 검찰청으로 일원화된다.
법무부 관계자는 9일 “범죄 피해자 예산은 가해자에게 쓰이는 수용, 교화 등의 예산 3조 원에 비하면 여전히 미미하지만 지원이 시급한 강력범죄 피해자와 유가족 지원은 확충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