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족 4명이 숨진 강원 양양군 주택 방화 사건 피의자 이모(41·여)씨가 범행 후 채권자 행세를 하며 피해자 가족에게 “대신 돈을 갚으라”고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씨는 피해자 박 씨(38·여)씨가 평소 우울증 증세가 있었다는 점을 이용해 박 씨가 스스로 불을 지른 것처럼 꾸미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워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속초경찰서는 이 씨에게서 빌린 돈 1800만 원을 갚지 않기 위해 박 씨 일가족 4명에게 수면제가 든 음료수를 먹인 뒤 불을 질렀다는 내용의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고 9일 밝혔다. 경찰은 이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이 씨는 지난달 29일 오후 9시 30분경 양양군 현남면 정자리 박모 씨(39·여) 집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박 씨와 큰아들(13), 딸(9), 막내아들(6) 등 4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씨는 초등생 자녀의 학부모 모임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박 씨에게 2013년 9월 돈을 빌렸지만 이를 갚지 못해 빚 독촉을 받자 사건 당일 오후 강릉에서 수면제 28정과 휘발유 2¤, 음료수 4병, 캔맥주 2개를 구입해 범행에 사용했다. 이 씨는 경찰에서 “지난달 26일 빚 독촉을 받았고 장애인 아들을 심하게 욕하는데 화가 나 범행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현장 감식 결과 휘발유 흔적이 발견됐고 출입문이 잠겨 있지 않은 점, 시신의 혈액과 위, 음료수 등에서 수면제 성분이 검출된 점을 들어 제 3자에 의한 방화로 추정하고 수사를 벌여왔다. 대부분 화재 현장의 시신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비해 이들 가족이 모두 위를 향해 반듯이 누워있었다는 점도 방화 단서로 꼽았다.
경찰은 박 씨의 집 신발장에서 차용증이 발견된 데다 현장 주변 폐쇄회로(CC)TV 분석 결과 화재 발생 직후 이 씨의 차량이 지나간 것을 확인하고 이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특히 사건 직전 이 씨가 박 씨와 통화하고도 자신의 휴대전화에서 통화 기록을 삭제한 뒤 통화한 적이 없다고 진술한 점을 수상히 여겼다.
경찰은 탐문 수사를 통해 휘발유와 수면제 구입 행적 등을 확보한 뒤 8일 오후 3시 50분경 서울에서 이 씨를 검거했다. 한편 숨진 박 씨의 남편(44)은 2013년 4월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뒤 요양 치료를 위해 가족과 떨어져 생활해 왔다.
양양=이인모기자 i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