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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 “詩人이 안됐으면…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않았을까”

입력 | 2015-01-10 03:00:00

[오뚜기와 함께 하는 오뚜기 인생]시인 고은




책에 취해 사는 고은 시인. 서재는 2만여 권의 책으로 가득하다. 안성 옛집에도 아직 그만큼의 책이 남아있다. 수원=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고은 시인(82)은 아직도 소년이다. 얼굴이 해맑다. 맑은 눈엔 호기심이 가득하다. 그는 뭐든 진지하다. 놀이에 빠진 소년처럼 열중한다. 평생 그렇게 살았다. 단 한번도 회피하지 않았다. 현실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렇게 질풍노도처럼 달려왔다. 그의 삶은 격류였다.

어릴 적 그는 약골이었다. 하루 종일 잠만 잤다. 헛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가족들은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이따금 확인해 볼 정도였다. 게다가 수줍음을 많이 타 ‘암사내’로 불렸다. 여자아이들보다 더 부끄러움을 탔다. 집에 낯선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얼굴이 빨개져 달아났다.

“난 커서도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으레 시선은 딴 쪽을 향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천관우 선생(1925∼1991)한테 된통 혼이 났다. ‘왜 사람을 앞에 놓고 사시(斜視)로 보는가? 난 인간모독을 당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네. 앞으로는 정시(正視)를 하게, 정시를!’ 천 선생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우렁한가. 그 이후부터 조금씩 고치게 됐다. 대중 강연도 그때부터 하게 됐다. 그전엔 정면을 바라보며 강연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30대 초반 제주에서 몇 년 살 때 어느 학교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아침조회 시간이었는데, 교장선생님은 ‘서울에서 오신 유명한 시인’이라며 아이들 기대를 잔뜩 부풀렸다. 전날 70여 장의 원고를 몇 번씩 읽으며 숙지했기에 자신 있었다. 하지만 한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 자신이 허허망망 허공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아이들은 이제나저제나 침을 삼키며 내 강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난 교단을 내려와 냅다 정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와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내 뒤를 쫓아온 사람이 있었다. 교장선생님이었다. ‘강연비용은 이왕 나온 것이니 받아 가시라’며 흰 봉투를 내밀었다. 그때 난 술값이 떨어져 궁한 시절이었다.”

1949년 중 3 어느 날, 고은은 자신의 영혼에 송두리째 불을 지른 ‘일대 인연’을 만났다. 하굣길에 우연히 ‘한하운 시초(정음사)’라는 시집을 주운 것이다. 집으로 오자마자 밤새 그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의 ‘전라도길’은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벼락이었다. 가슴이 벅차 빠개질 것만 같았다. 감격과 아픔에 마구 울었다. 고은은 그 즉시 ‘한하운처럼 문둥병자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그처럼 떠도는 시인이 될 것’을 맹세했다.

6·25전쟁이 터졌다. 지옥이었다. ‘감수성 덩어리’ 고은을 한순간 폐허로 만들었다. 좌우익간의 죽고 죽이는 보복학살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시체냄새가 몸에 켜켜이 눌러 붙어, 빨랫비누로 씻고 또 씻어내도 가시지 않았다. 고은은 절망했다. 산과 들로 몽유병자처럼 떠돌았다. 빨간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다니거나, 엿장수 노릇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말했다.

“난 삶의 환멸과 허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1951년 어느 봄날, 군산항 부두에서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일본인 항해사의 눈에 띄어 살아났다. 그 다음엔 양쪽 귀에 청산가리를 부어넣었다가 한쪽 고막이 녹아버렸다. 1963년 5월, 목포에서 제주로 가는 배 황령호에서는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목포 유달산에서 내 몸에 매달 돌을 마련했고, 갑판 위에서 ‘최후의 소주’를 마셨다. 적당히 취하면 ‘입수(入水)’할 참이었다. 달이 눈부시게 밝았다. 물결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그런데 마시고 또 마셔도 취하지가 않았다. 문득 ‘뿌우∼’하는 뱃고동소리가 들렸다. 아뿔싸! 배는 이미 제주항에 닿고 있었다. 1970년 북한산 정릉계곡에선 그동안 모아뒀던 수면제를 한 움큼 털어 넣고 잠이 들었다. 일부러 사람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골짜기를 택했다. 그런데도 그날 훈련 중이던 예비군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난 30여 시간 만에 깨어났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몸을 다스려야 했다.”

고은을 잠시나마 달래준 것은 절집생활이었다. 그는 1952년 일초(一超)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조계종 초대종정 효봉 스님(1888∼1966)의 제자가 됐다. 경남 통영 미륵섬 미래사에서 보낸 스승과의 생활은 행복했다. 10여 명의 제자 가운데 맏상좌가 구산 스님(1909∼1983)이었고, 고은이 중간, 그로부터 두세 번째 아래가 무소유로 이름난 법정 스님(1932∼2010)이었다.

“우린 토굴문중이었다. 하루 한 끼 먹으며 철저히 수행중심으로 살았다. 스승은 겸손하고 온화했다. 목소리도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새벽 3시 기상시간만은 추상같았다. 쩌렁쩌렁 맹수소리로 잠을 깨웠다. 날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생일을 기억했다가 국수와 떡도 해줬다. ‘오늘은 국수 먹기 좋은 날’이라며 만들게 하곤, 나중에 ‘네놈 귀빠진 날’이라고 알려줬다. 어느 꽃피는 봄날, 일렁거리는 춘심에 내 젊음이 폭발했다. ‘부처가 되면 뭐 하냐’며 선방의 구들장을 뜯어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러자 스승은 ‘맞다! 그거 돼서 뭐 하냐, 잠이나 자자’며 벌렁 드러누웠다. 한방 크게 얻어맞았다. 난 울면서 구들장을 다시 가져다놓고 잘못을 빌었다.”

1957년 고은은 총무원장으로 추대된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주필이 됐다. 이때부터 조금씩 필명을 날렸다. 급기야 1961년부터는 전국에서 가짜 고은이 홍길동처럼 동시다발로 출몰하기 시작했다. 김천에서는 한글백일장은 물론 한시대회 심사위원까지 가짜 고은 한 사람이 맡았다. 경기 광주에선 승려차림의 가짜 고은이 산스크리트어를 하며 나타났다. 그렇게 전국곳곳에서 여대생이나 문학청년들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였다. 1968년 서울에서 가짜 한 명을 붙잡았다.

“내가 피해여성, 사복형사와 함께 단성사 옆의 백궁다방에서 잠복했다가 잡았다. 사내답지 않게 피부가 고왔고,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때 그의 예쁜 부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자신도 고 선생인줄 알고 결혼했는데, 살아보니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새사람 만들겠으니 제발 용서해달라고 했다. 난 그를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사줬다. 그리고 따귀를 두 대 갈기며 말했다. ‘피차 안 만나야 될 사람들이 만났다. 그렇다고 그냥 그대로 보낼 줄 순 없다. 앞으로는 네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현재 시인이기도 한 신흥사 조실 오현 스님(83)도 가짜 고은에게 당했다고 한다. 문청시절 피 팔아서 가짜 고은에게 밥 사고 술 샀다는 것이다.”

고은은 따뜻하다. 교조적이지 않다. 어릴 적 친구가 코피를 흘리자, 자신의 콧등을 쳐서 피가 나게 할 정도였다. 그는 바람처럼 떠돌았다. 거칠 것 없는 자유인으로 살았다. 영락없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고은 아버지는 눈부신 달밤이면 마당에서 혼자 덩실덩실 춤을 추곤 했다. 고은도 비 오는 날이면 조계사 앞마당에서 발가벗고 너울너울 춤을 췄다. 그걸 보고 로맨티스트 청담 스님(1902∼1971)은 ‘얼씨구, 좋구나’라며 박수를 치곤 했다.

“난 시인이 안 됐으면 뭐가 됐을까.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않았을까. 시란 원초적인 것이다. 우주의 사투리다. 내 속엔 불이 들어있다. 식지 않은 분화구라고나 할까. 어느 봄날 나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던 장모님이 휠체어 타신 채 ‘벚꽃 참 좋구나!’하시며 돌아가셨다. 얼마나 선적이고 시적인가. 난 젊은 날 제주의 파도소리에서 시의 율동을 얻었다. 청춘을 독한 소주와 함께 보냈다. 난 평생 학생이다. 이젠 책이 술이다. 호흡이다. 무질서하게 난독하다가, 미치면 정독한다. 서재는 내 자궁이다. 서재에 있으면 편안하다. 한때 난 포도주를 구정물로 알았다. 그런데 요즘엔 가끔 포도주를 한잔씩 마신다. 오, 좋다.”








아내 생일 기념 깃발이 펄럭이는 마당가 솔밭.

▼“어머니가 나를 낳았고, 그 뒤로는 아내가 다시 나를 낳았다”▼

시인 고은과 영문학자 이상화의 ‘사랑’


“아 내 상화의 사랑 없이는, 상화와의 삶 없이는 난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벌써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또한 시집 ‘조국의 별(1983년)’ 이후 내 문학의 많은 결실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 내 작품은 아내와의 합작이다. 난 아내 없인 아무것도 아니다.”

고은과 그의 아내 이상화(李相華·68)는 1974년 어느 날 우연히 만났다. 당시 이상화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한창 공부 중이었다. 그녀는 고은에게 긴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고은은 ‘황량한 수렛길에서, 딴전의 술’만 마셔댔다. 1979년 또 긴 편지를 몇 통째 보냈다. 여전히 고은은 ‘거리의 불온’에 파묻혀 있었다.

이러구러 1982년, 고은은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이상화와 해후했다. 그때 고은은 김대중 내란음모죄로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8·15사면으로 감옥에서 막 풀려난 상황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들은 이듬해 5월 5일 서울 수유동 안병무 교수의 집 뜰에서 함석헌 선생의 주례로 극비 결혼식을 올렸다. 고은 나이 쉰, 이상화 서른 여섯.

1983년 5월 5일 서울 수유동 안병무 교수 집 뜰에서 결혼식을 올린 고은, 이상화 부부. 동아일보DB

내로라하는 100여 명의 재야인사들이 모두 모였다. 사회는 리영희 선생이 맡았다. 문익환 목사가 축시를 읊었고, 백낙청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만남’이라고 덕담을 했다. 고은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안기부 직원이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축의금 ‘몇 푼’을 보탰다. 박형규 목사 내외가 고이 모셔뒀던 사모관대 원삼족두리를 빌려 입고 뒤늦게 기념사진도 찍었다. 식후 신랑신부는 그곳을 ‘어서어서 달아나’ 한강 기슭을 내려다보며 단둘이 되었다.

“아내는 나에게 ‘당신을 처음 봤을 때 저분은 언젠가 나한테 올 사람이라는 영적 확신을 가졌었다’고 토로했다. 우리는 안성 공도면 마정리 대림동산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이문영 교수가 ‘하느님이 고은 선생 살 집을 지상에 내려놓은 것을 보고 왔다’며 소개한 집이었다. 그의 말에 다짜고짜 축의금을 털어서 샀지만, 여기저기 손봐야 할 곳이 많았다. 수선은커녕 생활비가 없어 아내가 한동안 고생이 많았다. 집은 1971년 연희동아파트가 처음이었다. 그것은 모두가 박맹호 민음사 사장 누님 덕분이었다. 그 누님이 ‘고은 시인 원고료 줘봐야 술 먹거나 남들 줘 버리니 내가 압수하겠다’며 보관했기에 가능했다. 소설가 최인호가 살던 동네였는데, 당시 난 그의 ‘술꾼’이라는 단편에 매료돼 있었다. 이웃인 그와 술깨나 마셔댔다. 대지 85평의 서울 화곡동 집은 1973년에 샀는데, 그것도 역시 원고료를 모아준 그 누님 덕분이었다. 그곳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회의장소로 사람들 기억에 새겨졌다. 안성집은 딱 30년 살았다. 그곳에서 딸 차령(30)을 낳았고, 만인보 30권을 썼다. 마침 안성집 앞에선 차령산맥 등줄기가 빗금 치며 지나갔다. 아이가 생겼을 때 우리 부부는 딸이든 아들이든 ‘차령’이라고 이름 짓기로 했다.” 고은은 모든 게 늦었다. 모든 것이 ‘중얼중얼 늦게’ 왔다. 집도, 여권도, 은행계좌도, 자전거도, 난데없는 석좌교수도, 명예박사도, 그리고 사랑도 달팽이처럼 엉금엉금 기어 왔다. 그의 아내는 ‘오월의 신부’로 맨 마지막에 나타났다.

고은은 2013년 여름 거처를 수원 광교산 자락 상광교동으로 옮겼다. 수원시의 적극 요청에 ‘수원의 귀신’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지하 1층 지상 1층에 연면적 265m² 규모의 개인주택. 이곳에서 ‘고은문학의 꽃을 피우리라’며 가슴 부풀어 있다.

요즘 마당가 솔밭엔 ‘상화의 날’ ‘賀嶺相華(하령상화)’라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고은이 얼마 전 아내 생일기념으로 매달아 놓은 것이다. 고은의 아내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말대로 사랑은 ‘하였다’도 ‘하리라’도 아니고, 늘 ‘한다’인 것이다.

그는 1997년 딸을 위한 동시집 ‘차령이 노래’에 이어 2011년 아내를 위한 시집 ‘상화시편-행성의 사랑’을 내놓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낳았고/그 뒤로는 아내가 다시 나를 낳았다/도저히 함께일 수 없는 것이 함께인 것/나의 어머니인 아내’라고 노래했다. 아내 상화도 화답했다.

‘어느 별에서 왔느냐고/불쑥 묻지 말아요/어느 별에서 왔기에/우리의 사랑 이리도 끝없고 바닥도 없는 것이냐고/다그치며 묻지 말아요//이 행성의 한 점에서/내가 당신에게로 갈 때/이 행성의 한 점에서/당신은 내게로 온 것이에요…’





:: 고은 약력 ::

▽1933년 8월 1일 전북 군산 출생 ▽미룡초등학교 입학(1943)-4학년 월반(1945) ▽군산중 수석입학(1947) ▽군산중 4학년 휴학(1950 6·25) ▽출가. 법명 일초(一超·1952) ▽효봉 스님 제자(1953) ▽불교신문 창간 초대주필(1957) ▽현대시 제1집에 ‘폐결핵’ 발표(1958) ▽해인사주지대리(1960) ▽환속 선언(1962) ▽동화통신부장대우(1969) ▽아버지 타계(1970) ▽자유실천문인협회 초대대표간사(1974)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 선포 가택구금(1975) ▽민주구국헌장 사건 주모자로 체포(1977)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투옥(1979)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20년형 선고(1980) ▽8·15사면 석방(1982)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1987)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1989) ▽사면복권 첫 복수여권 발급받음(1993) ▽히말라야순례 중 어머니 별세(1997)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버클리대 초빙교수(1999)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2000) ▽겨레말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상임위원장(2005∼) ▽서울대 초빙교수(2007) ▽단국대 석좌교수(2008)

▼작품=시 소설 평론 에세이 등 160여 권의 저서. 시집은 서사시 ‘백두산’ 7권, 전작시 ‘만인보’ 30권을 비롯해 70여 권, ‘고은시전집’과 ‘고은전집’이 있다. 세계 25개국 말로 시와 소설이 번역 출판됐다. ‘만인보’는 스웨덴에서 ‘현대의 고전’으로 선정돼 중고교 외국문학 교재로 채택.

♣훈장 ▽은관문화훈장(2002) ▽노르웨이 비에른손 문화훈장(2005)

♣수상 ▽한국문학 작가상(1986) ▽만해문학상(1988, 1998) ▽중앙문화대상(1991) ▽대산문학상(1994) ▽영랑문학상(2007) ▽스웨덴 시카다문학상(2006) ▽캐나다 그리핀문학상, 평생공로상(2008) ▽유심문학상(2008) ▽공초 오상순문학상(2014) ▽마케도니아 스트루가 국제시축제 황금화관상(2014)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