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참사, 청와대 기강해이에도 김기춘 비서실장 왜 싸고도나” ‘그건 안 된다’며 직언은커녕 ‘윗분의 뜻’ 받들며 ‘검찰 다잡기’ 대통령이 원하는 참모 역할인가 청와대 인적쇄신 없이는 개혁 골든타임 놓칠까 두렵다
김순덕 논설실장
오전 10시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이 이런 말로 시작된다면, TV 카메라는 방향을 홱 틀어 기자들 얼굴을 잡는 게 좋겠다. 허를 찔린 듯 입을 딱 벌리거나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옆 사람과 확인하느라 부산할 것이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왔다는 비판을 들어온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의 사표도 수리했습니다. 제 동생과 관련된 일로 청와대에서 물의를 일으켜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습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저는 앞으로 국가운영의 중추는 비서실 아닌 내각임을 분명히 하고, 책임총리 책임장관제 확립에 힘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정치란 이런 것이구나, 역시 대통령이구나 하는 감동의 물결이 회견장에 출렁일 수도 있다. TV를 보는 국민도 이제야 대통령이, 나라가 좀 달라지려나 보다 싶어 입이 저절로 벌어질 것이다.
물론 상상이다. 어제까지도 청와대는 회견의 방점이 경제와 남북관계에 있다며 ‘정윤회 문건’과 관련해선 인사쇄신을 포함한 국정쇄신 로드맵이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김 실장과 ‘문고리권력 3인방’을 해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대통령의 친동생이 직간접으로 연루돼 온 나라를 뒤흔든 사건임에도 대통령 기준에서 보면 김 실장도, 3인방도, 동생 지만 씨는 더더구나 잘못한 게 없다. 불장난한 자와 불장난에 춤춘 자만 나빴을 뿐이다.
국정쇄신안이 얼마나 거창할지 알 수 없지만 인사시스템 개편 방안에 대해선 작년 6월 26일 총리 후보자 2명의 잇단 낙마 뒤 정홍원 총리를 다시 주저앉히며 발표한 바 있으니 캐비닛 속을 뒤져보기 바란다. 대통령인사수석비서관실을 설치하고 산하에 인사비서관과 인사혁신비서관을 둔다는 내용인데 혁신비서관은 입때 공석이다. 그 뒤에도 김명수 정성근 두 장관 후보자가 검증 미비로 낙마했고 인사잡음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인사위원장을 겸한 김 실장과, 대통령이 “일개 비서관이고 심부름꾼”이라면서 인사위까지 참석시키는 이재만 비서관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런데 무슨 쇄신안을 또 내놓겠다는 건가.
한 전직 부속실장은 “대통령에게 ‘그건 아니 되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게 비선의 진정한 특권”이라고 했다. 차라리 그런 비선이라도 있으면 낫겠다. 주변에 온통 ‘윗분의 뜻을 받드는’ 사람만 가득한 대통령은 행복한 대통령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대한민국 제2도약의 골든타임마저 놓치는 불행한 대통령으로 끝날까 걱정이다.
지난해 대통령은 분홍빛 옷차림으로 신년회견에 등장했다. 오늘은 화사한 옷을 입지 못할 것 같다. 미리 질문을 알려주고 대통령이 쪽지를 보며 답변할 수 있게 배려했던 기자들도 올해는 대통령이 왜 비서실 인적 쇄신을 못하겠다는 건지 집요하게 따져 물을 것이다. 만일 대통령이 “국정쇄신 로드맵으로 답변을 대신하겠다”며 그냥 넘어가려 한다면 반드시 다시 한 번 캐물어주기 바란다.
“대통령에게 직(職)을 걸고 직언(直言)하는 참모 역할은커녕 ‘인사 참사’에 문건파동 기강해이까지, 윗분의 뜻 받드는 것 말고는 잘한 게 없는 김기춘 실장을 해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윤회 문건에 나왔듯이 김 실장의 ‘검찰 다잡기’가 앞으로도 계속 필요하기 때문입니까.”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