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토목기술로 ‘백제판 뉴딜정책’… 기울어진 나라 제2의 중흥기 이끌어
330년 완공된 백제시대 저수지 벽골제에는 아직도 높이 5m에 달하는 수문 돌기둥이 남아 있어 한반도 최초 대규모 저수지의 위용을 보여준다. 벽골제는 당시 1만 ha에 달하는 논에 물을 댄 것으로 추정된다. 노중국 교수 제공
지평선에서 해가 뜨고 질 만큼 드넓게 펼쳐진 김제평야. 예부터 곡창지대로 이름 높았던 이곳에는 최고 높이 4.3m에 이르는 약 3km 길이의 제방과 5m에 달하는 수문 돌기둥들이 남아 한반도 최초의 대규모 저수지의 위용을 간접적으로나마 전하고 있다. 바로, 백제 11대 비류왕(제위 304∼344년)이 330년 연인원 32만 명을 동원해 만든 ‘벽골제’다.
벽골제는 1만 ha에 달하는 논에 물을 댔던 것으로 추정된다. 흙으로 만든 저수지가 이 엄청난 수량과 수압을 감당할 만큼 견고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백제가 진작부터 중국에서 들여와 재빨리 제 것으로 소화했던 뛰어난 토목기술이 있었다. 나뭇가지, 잎 등을 깔고 흙을 다져 응집력을 높이는 ‘부엽공법’, 나무로 만든 틀에 흙을 켜켜이 다져 넣는 ‘판축기법’ 등이 그것이다. 백제가 벽골제를 비롯해 한반도 삼국 중 가장 빨리, 가장 많은 저수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기술들을 일찍부터 익혀 온 ‘기술 강국’이었던 덕분이다.
이런 역량은 후일 기울어 가던 국운을 다시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과의 전쟁에서 패한 백제는 황급히 웅진으로 천도했다. 이때 한강 유역, 경기도 일대 곡창지대를 모두 뺏기면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백성들은 굶주리다 못해 걸식하며 떠돌아다니거나 살길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 궁핍해진 국고로 더욱 약화된 왕권은 귀족들의 반란을 불러 웅진 천도 후 26년 동안 무려 3명의 왕이 여기에 휩쓸려 암살되거나 단명했다.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지던 사회 분위기는 무령왕이 반란을 진압한 후 전국적인 저수지 사업을 선포하면서부터 뒤바뀌기 시작한다.
이는 이른바 ‘백제판 뉴딜 정책’이라 할 만했다. 축적된 토목기술로 곳곳에 새 저수지를 만드는 한편 낡은 시설을 보강하자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훌쩍 뛰었다. 또 금강 및 영산강 유역권 개간으로 새로운 곡창지대가 확보되면서 백성들의 형편과 나라 살림도 피기 시작했다. 저수지 공사는 일자리 창출로 사회 안정도 가져왔다. 유민과 부랑자들을 공사에 투입해 일시적으로나마 민생고를 해결하게 하고, 이후 개간된 농토에 정착시켜 궁극적인 생계까지 마련해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규모 국책사업은 중앙정부의 건재함을 다시 확인시키며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백제의 저수지 축조 기술은 바다 건너 왜에도 전파돼 왜의 경제 활성화와 왕권 강화를 뒷받침해 주기도 했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저수지이자 가장 대표적인 저수지인 사야마이케(陜山池)에도 부엽공법, 판축기법이 활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신 기술을 신속히 습득하고 발전시켜 이를 재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백제와 오늘날 세계 ‘정보기술(IT) 강국’으로 거듭난 한국은 닮은 셈이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