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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백탑파 이야기

입력 | 2015-01-12 03:00:00


지금 서울 중심에 남산 송신탑이 있다면 18세기 조선에는 백탑(白塔)이 있었다. 백탑은 서울 종로3가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2호)을 말한다. 단종을 죽이고 보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며 원각사를 창건했다. 그때 만들어진 10층 석탑은 우리나라에선 드물게 화강암이 아닌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백탑으로 불린다. 백탑은 고층건물이 없던 조선시대 한양 한복판에 높이 솟아 랜드마크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정조 집권기인 18세기 후반, 상공업의 발달로 한창 변화하는 도성의 중심가에 모여 살며 교류하던 젊은 학자들이 있었다. 백탑 주변 탑골에 살던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과 남산 자락에 살았던 홍대용 박제가 백동수가 그들이다.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곤궁함 속에서도 이들은 한양 남북을 잇는 수표교를 부지런히 오가며 서얼 신분과 연령의 벽을 넘어 우정을 쌓는다. 서상수의 사랑방에서 거문고의 대가 홍대용이 거문고를 뜯으면 이덕무가 시를 짓는 풍경을 상상해 보라.

▷이들은 단순히 풍류를 나누는 데서 나아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라를 변혁시키고자 했다. 흔히들 실학자 중 북학파라고 알려진 이들이 바로 ‘백탑파’다. 200여 년 전 조선의 주류 사상이었던 성리학을 거부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고 했던 ‘젊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서울역사박물관 ‘탑골에서 부는 바람―백탑파 이야기’전을 통해 펼쳐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를 극복하고 문화적 자신감이 회복되던 시기에 태동된 백탑파를 먼저 알아본 것은 정조였다. 새로운 사조로 기득권 집단인 노론을 견제하려 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이들 가운데 상당수를 등용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던 이들의 사상은 정조의 의심을 사게 됐다가 후견인인 정조마저 갑작스럽게 죽어 이들의 꿈은 현실화하지 못한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변혁은 기득권에서 자유로운 젊은이가 주도하게 마련이다. 변혁을 꿈꾸고 도전하며 좌절도 하는 청년세대가 있기에 역사는 발전한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