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균 문화부 기자
지난해 말 술자리에서 한 동료 기자에게 받은 지적이다. 유쾌하지 않았지만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글에서 혹시 지나친 일반화의 어감이 없었는지 돌이켜 반성했다.
그러고 얼마 뒤, 한국을 떠난 지 10년쯤 지난 중학교 동창과 처음으로 긴 e메일을 주고받았다. 디자인 일을 하는 그 친구는 몇 달 전 쓴 표절 관련 기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그 친구는 외국에 거주하는 무수한 한국인 중 한 명이다. 그의 의견은 어떤 기준도 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며 술자리 동료에게 반박할 이야기가 생각났다. 일반화할 수 없다 한들, 현상의 조각이 지닌 문제가 명백히 존재하지 않는가. 그 조각의 모음은 비판받아 마땅할 방향성의 흐름을 크든 작든 만들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가 사고로 떠나신 후 일상 대부분의 염려는 어머니의 안위다. 운전을 못하시는 어머니가 일 때문에 혼자 외출하실 때마다 마음이 어지럽다. 횡단보도 주변에서 교통법규가 원칙대로 완벽하게 지켜지는 광경, 서울에서 언제 목격했는지 기억에 없다. 요즘은 운전을 마칠 때마다 안도한다. 다행히도 탈 없이 집에 잘 돌아왔구나 싶어서.
친구는 “원칙을 지키며 사는 것이 엄격한 제도 적용이나 사회의 관습적 분위기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동의하지 않는다. 혼자 일하고 생활하더라도 타인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아야 하는 세상이다. 그런 사회 속에서 한 개인으로 하여금 원칙을 지키도록 만드는 근간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임은 틀림없다. 잊어서 안 될 것은, 그 자존감을 떠받치는 뼈대가 ‘원칙이 그럭저럭 지켜지고 있구나’라는 무언의 공감이라는 점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언터처블’(1987년)은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원료 삼아 가공한 영화다. 어떤 협박이나 뇌물로도 회유할 수 없는, 결코 건드릴 수 없는(untouchable) 의협심 강한 경찰들이 고난과 희생 끝에 악당 알 카포네를 처단하는 이야기. 유려한 만듦새와 대조적으로 캐릭터가 평면적이다. 악인은 딱 못되게, 정의로운 경찰은 그저 선하게 생겼다.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