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영진 작가
이 광장은 영국을 정복하려던 나폴레옹의 야심을 꺾었던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방 모서리에는 당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허레이쇼 넬슨 제독 상을 중심으로 세 개의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서북쪽의 기단은 160여 년간 빈 채로 남아 있었다. 자금 확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왕립예술협회(RSA)는 이 골칫거리 공간을 두고 아이디어를 냈다. 1999년부터 공모를 통해 새로운 현대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정된 작품은 1년에서 1년 반 정도 전시된다.
영국 작가 레이철 화이트리드는 ‘네 번째 기단 프로젝트’에 선정됐다. 그는 놀랍게도 기단 자체를 주물로 뜬다는 발상을 했다. 비어 있는 기단을 형상화한 ‘모뉴먼트’(2001년·그림)가 설치됐다. 그의 조각은 투명하기까지 하다. 작가는 기단을 거꾸로 뒤집어 그 거울 이미지를 만든 셈이다.
화이트리드에 이어 이 기단에 오른 작품으로는 장애인 미술가의 임신한 몸을 조각한 마크 퀸의 ‘임신한 앨리슨 래퍼’(2005년), 현재 설치돼 있는 카타리나 프리치의 새파란 ‘수탉’(2013년) 등이 있다. 조각은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발상으로 시작된 트래펄가 광장의 네 번째 기단은 오늘날 영국의 현대조각을 대표하는 공간이자 세계적 미술 명소가 됐다. 2001년 화이트리드의 작업은 그중 가장 돋보인 사고의 전환이라 하겠다.
전영백 홍익대 예술학과(미술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