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치부 차장
이틀 뒤 이 대통령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만났다. 난국 타개를 위해 손을 내민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이렇게 조언했다. “전반적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가 많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민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이 되면 민심과 동떨어진 보고를 받는다든지 밑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모를 수 있다. 잘못된 보고를 하지 않도록 의사소통을 정확히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
같은 달 19일에는 이 대통령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의 정례 회동이 예정돼 있었다. 회동에 앞서 한나라당은 이 대통령에게 전할 A4용지 10장짜리 ‘국민 신뢰 회복 방안’을 만들었다. 보고서에는 내각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책임총리제를 강화하고 부처 장관에게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정청 정책 조율을 위한 정책특보 신설도 건의했다.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은 능력을 재검증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사실상 인적 쇄신 요구였다. 청와대는 ‘수용 거부’를 통보했다. 보고서는 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은 채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박근혜 대통령도 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정윤회 동향’ 문건 파동과 관련해 “송구스럽다”고 사과했다. 손에 잡히는 국정 쇄신 방안이 없는 점도 7년 전과 닮았다. 청와대 조직 개편과 특보단 구성을 언급했지만 ‘복고풍 쇄신안’이다. 7년 전 한나라당이 만든 ‘국민 신뢰 회복 방안’보다도 감동이 없으니 말이다.
광우병과 문건 파동은 ‘거짓과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진위를 떠나 정부 신뢰가 추락한 점도 같다. 정권의 위기감 측면에선 광우병 파동이 문건 파동을 압도했다. 하지만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에서 개구리가 뛰쳐나올 생각을 못하듯 위기감이 덜한 문건 파동이 정권에겐 더 독(毒)이 될지 모른다. 더욱이 지금 박 대통령에게는 7년 전 이 전 대통령에게 조언했던 박 전 대표 같은 존재도 없다.
이재명 정치부 차장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