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번역원, 일성록 중 정조 재위 기록 16년만에 한글 번역
10년간 일성록 번역에 매달린 김성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그는 1년에 원고지 3600장 분량의 번역문을 소화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고 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그해 8월 중순부터 종기를 심하게 앓은 정조는 며칠째 음식을 넘기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다. 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먹을 약제를 의원들과 일일이 토론했다. 정조는 몸에 열이 많은 자신의 체질을 감안해 인삼이 들어가는 경옥고 사용을 꺼렸다. 유학 경전은 물론 한의학에도 능통했던 ‘학자 군주’ 정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이 16년 만에 ‘일성록(日省錄·사진)’의 정조 재위 기록에 대한 번역을 최근 마쳤다. 이 시기의 기록은 일성록 전체 분량의 40%를 차지한다. 일성록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국가기록물 중 하나다.
‘이날 유시에 상(정조)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점선 안)는 문장이 적힌 일성록의 1800년 8월 18일자(양력) 기록.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제공
정조는 마지막까지 병상에서 업무보고를 챙기며 국정에 매진했다. 서거 하루 전인 1800년 8월 17일 그는 “도목정사(都目政事·정기 인사)가 임박했는데 정관(政官)의 일이 딱하게 되었다. 민사(民事)에 관련된 일이 있으면 비록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도 낱낱이 내게 물어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민본 행정을 최우선시한 정조의 국정 철학이 읽힌다.
일성록은 왕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됐다는 점에서 사관이나 승지가 쓴 실록, 승정원일기에 비해 왕의 통치 철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 승정원을 거치지 않는 지방관의 장계(狀啓·보고서)나 암행어사의 서계(書啓) 전문을 수록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내용도 실록에 비해 훨씬 자세하다. 예컨대 정조 때 흉년을 맞아 전국에서 진휼(식량 구호 제도)을 실시한 것과 관련해 일성록은 곡식을 지역별로 얼마나 배포했는지는 물론이고 고을마다 굶주린 사람이 몇 명이었으며 재원은 누가 마련했는지 등을 세세하게 적고 있다. 반면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는 소요된 재원 등만 요약된 수치로 제시하고 있다.
일성록 번역은 고전번역원이 촉탁한 외부 번역위원 11명과 직원 2명이 이뤄 낸 성과다. 이 중 1년에 원고지 3600장 분량의 살인적인 번역 작업을 감당한 김성재 번역위원(58)은 2004년부터 일성록 번역에 매달렸다. 그는 ‘이날 유시(酉時·오후 5∼7시)에 상(정조)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는 15자의 원문 번역을 마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 컴퓨터 앞을 잠시 떠나 있어야만 했다.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초 종기 제거 수술을 받으면서 종기로 숨을 거둔 정조를 내내 떠올렸다고 했다.
김 위원이 10년을 마주한 인간 정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