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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로보트 태권 V’는 꼴보수?

입력 | 2015-01-15 03:00:00


때는 2012년, 내가 국내 한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등의 후보작으로 오른 로맨틱코미디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상영이 심사장에서 끝나자 내 옆에 앉은 연로하신 심사위원 A 씨가 내게 물었다. “이 영화, 관객이 얼마나 들었소?” 내가 “400만 명쯤 봤다”고 답하자, 눈을 질끈 감은 A 씨는 탄식하며 말했다. “말세다. 말세. 이런 쓰레기 영화를 수백만이 봤다니. 요즘 젊은이들, 걱정돼.”

A 씨의 말인즉 이 영화는 ‘개판 5분 전’이므로 쫄딱 망했어야 마땅하다는 것. 아내와 헤어지기 위해 이웃집 카사노바를 고용해 아내를 유혹하도록 만든 남편이 결국 아내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의 이 가족 파괴적이고 저질인 영화를 물경 400만 명이 보는 현실은 인륜이 썩어 문드러진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는 주장이었다. 이 영화를 그저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던 나는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인 것을. 그러니 꼰대 소리를 듣지…’라고 속으론 씹으면서도 겉으론 “예에” 하면서 건전한 인간인 척했다.

어떤 영화엔 이념과 사상이 담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국제시장’을 둘러싸고 일부 진보인사는 “‘독재정치’를 쏙 뺀 채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경제 발전이란 편협한 시각으로 보면서 기성세대를 무한 찬양하는 ‘꼴보수’ 영화”라고 비판하지만 이런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나는 피식 웃음이 먼저 났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을 기억하시는지. ‘6·25전쟁 중 두메산골 동막골에서 우연히 만나 형제처럼 지내게 된 국군과 인민군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안타까운 운명을 맞는다’는 내용을 담은 ‘웰컴 투 동막골’이란 영화가 크게 흥행했을 때 일부 보수인사가 “좌파 영화”라고 공격했던 바로 그 순간을 기억하시는지. 당시 진보인사들은 “한심하다. 이러니 꼴보수란 얘기를 듣지”라며 이렇게 반박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참 이상하다. 똑같은 영화인데, 왜 어떤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고 또 어떤 영화는 ‘나쁜’ 영화가 되는 걸까. 이래서 색안경을 끼고 영화를 보는 것은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는 꼴밖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국제시장을 ‘보수의 올바른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영화’로 보는 시각도 그다지 옳지는 않다고 생각한다(사회적 논쟁이 발생했을 때는 ‘양쪽 다 문제가 있다’는 양비론을 펼치는 것이 가장 있어 보이는 길이다). 가족의 가치가 보수이념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보수적’이겠지만 이 영화가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는 해석은 ‘오버’한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던 덕수(황정민) 부부가 때마침 태극기 하강식이 시작돼 애국가가 나오자 부부싸움을 멈추고 국기배례를 하는 장면을 ‘애국적 시대의 공기’로 해석하는 정치인도 있지만, 놀랍게도 이 장면을 본 내가 아는 한 여중생은 이렇게 딱 잘라 말했다. “짱(매우) 웃겨.”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이 여중생은 외려 “주인공 부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학교 역사시간에 전두환 같은 옛날 독재자들 얘길 들었는데 독재시대엔 저럴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신세대는 문제의 장면을 국민의 선량한 애국심을 체제 유지에 이용한 독재정권을 꼬집는 배꼽 잡을 풍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이 여중생은 “우리 할아버지들이 저렇게 고생한 줄은 몰랐다.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싸가지 없는 여동생 뺨 한 대 때리고 집 나가서 혼자 잘 먹고 잘살지 절대로 저런 개고생은 안 한다”면서 “갑자기 시골에 계신 외할아버지가 불쌍하게 여겨진다. 이번 설에는 사업하는 이모부에겐 세뱃돈을 10만 원 받아내고 말겠지만 할아버지에겐 한 푼도 안 받겠다”는 난데없는 말로 부모를 깊이 감동시키면서 용돈을 5만 원 더 받아갔다.

국제시장을 ‘꼴보수’ 영화로 치부한다면 똑같은 시각에서 더욱 비난해야 마땅한 영화는 국산 공상과학(SF) 애니메이션의 효시인 ‘로보트 태권 V’일 것이다. 이 만화는 악의 무리를 ‘붉은 제국’이라 부르면서 ‘붉은색=나쁜 것’이라는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며 ‘빨갱이 소탕’의 메시지를 은밀히 전하는 ‘꼴보수 만화’가 분명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 만화엔 단짝친구인 소년 ‘훈’과 소녀 ‘영희’가 태권 V를 함께 조종하는데 공교롭게도 지구를 구하는 이 훌륭한 소년 소녀를 길러낸 아버지들(두 아버지가 모두 ‘박사’다)만 등장할 뿐 어머니들은 시종 머리털 하나 보이질 않지 않는가. 아, 그렇다면 이 만화도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주의를 아이들에게까지 전파하는 위험한 영화?

아무 죄 없는 영화를 두고 ‘네가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투로 표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문득 요즘 한창 몰입해 보는 TV 드라마 ‘펀치’의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세상은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대결이 아니다. 단지 나쁜 사람과 덜 나쁜 사람의 대결일 뿐.’

묻는다. 당신은 나쁜 사람인가, 덜 나쁜 사람인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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