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 문화’ 변화가 필요해

청와대 세종전실에 진열된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 이명박,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최규하, 박정희, 윤보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상화(왼쪽부터)가 보인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퇴임과 동시에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초야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임기 중 과오를 짊어지고 뒷방에 물러앉은 모습이 액자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동아일보DB
사상 최대 규모의 ‘조문외교’가 펼쳐진 그곳에 박근혜 대통령은 정홍원 국무총리를 특사로 보냈다. 만약 박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특사로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이 전 대통령은 이날 연설을 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 각국 정상과 친분이 두텁다. 각국 정상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데 있어 정 총리보다는 이 전 대통령이 적임자였다는 얘기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당(黨)도, 노선도 다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부부를 대통령 전용기(에어포스 원)에 태워 함께 남아공으로 왔다.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다.

DJ 정부 초기 YS 주변 인사에 대한 사정 바람이 거세게 일자 YS는 DJ를 향해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전현직 대통령이 정면충돌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서거한 뒤 이번에는 DJ가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향해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YS는 다시 DJ를 향해 “그 입을 닫으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전현직 대통령들이 얽히고설켜 서로를 비난하는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품격도 함께 추락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현재까지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적이 없다. 그나마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은 4명뿐이다. 그중 노태우 전 대통령과 YS는 건강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 전 대통령만 초대하는 것도 청와대로선 부담일 것이다. 전 전 대통령과는 미납 추징금 문제로 관계가 편치 않다. 이 전 대통령과는 오랜 기간 여권 내 세력 다툼을 벌여 왔다.
박 대통령뿐 아니라 역대 모든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과 거리를 뒀다. 수많은 과오를 멍에처럼 짊어지고 역사 속으로 퇴장한 전직 대통령들을 가까이하는 게 정치적 실익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은 퇴임과 동시에 ‘뒷방 신세’다. 문제는 그의 퇴장으로 소중한 국정경험도 함께 묻힌다는 점이다. 전직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 경험은 국가의 자산이다. 하지만 그 자산은 다시 사회로 환원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시계는 5년마다 리셋(초기화)된다. 교훈도, 반성도, 발전도 없이….
2008년 1월 초 정국은 살얼음판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측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설전을 주고받았다. 노 대통령은 발언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점령군’ 행세를 한다며 불쾌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같은 달 4일 경제계 신년 인사회 자리에서다. 노 대통령은 “안 그래도 초라한 뒷모습인데, 요새는 (인수위로부터) 소금까지 날아오는 것 같다. 소금을 더 뿌리지 않으면 나도 오늘로 이야기를 그만할 것이고, 앞으로 계속 소금 뿌리면 내가 깨지고 상처 입겠지만 계속 해보자”고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총장)은 노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평을 냈다. 그러자 이 대통령 당선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가 이런 논평을 내라고 했어! 야, 너 앞으로 마이크 잡지 마!” 이 총장은 “그날이 이 대통령에게 가장 심하게 욕을 먹은 날”이라고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전직 대통령을 최대한 예우하라고 거듭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니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해 상반기 노 전 대통령의 대통령기록물 무단 반출 논란이 커지면서 양측은 다시 충돌했다. 노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퇴임 이후 활동에 의욕을 보였다. 시민참여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며 ‘민주주의 2.0’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의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는 그를 보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김경수 전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은 “일종의 하방(下放)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처음 시민운동을 할 때의 마음으로 시민의 일상적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듬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전직 대통령상(像)을 만드는 일은 다시 5년 뒤로 미뤄졌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이 발간되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녹색성장과 같은 이명박 정부의 브랜드 정책을 적극 알리고, 자신이 만든 마이스터고(맞춤형 전문 직업교육 고교) 등을 찾아 강연을 할 계획이다. 이동관 총장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는 행보를 구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직 대통령의 롤모델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까지 ‘리셋’만 반복할 건가
이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각국의 초청을 받아 외국에만 아홉 번 다녀왔다. 지난해 10월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쯔엉떤상 베트남 국가주석은 이 전 대통령과 함께 베트남을 찾은 중소기업인 20여 명을 모두 주석궁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술이 몇 잔 돌자 이 전 대통령은 쯔엉떤상 주석의 손목을 잡아끌어 중소기업인들과 일일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청했다. 주석은 기꺼이 응했다. 그 사진 한 장은 베트남에서 가장 확실한 신원보증이다. 전직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 성과인 셈이다.
퇴임 이후에도 이 전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는 임재현 전 대통령부속실장은 “전직은 현직에 비해 말이나 행동이 훨씬 자유롭다”며 “외교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현직 대통령을 도와 국익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상을 새롭게 만들려면 현직 대통령이 활동 영역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미다. 현직 대통령 중 누군가는 전직 대통령의 국정경험이 의미 없이 사장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안정적 지지층을 확보한 박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을 끌어안을 수 있는 적임자로 꼽힌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이 전 대통령의 녹색성장을 창조경제와 연결했다면 훨씬 구체적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전직 대통령이 갖고 있는 자산을 잘 발굴해 국정운영에 활용하면 그것이 곧 통합이고 소통”이라고 강조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은 “성공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실패학”이라며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왜 실패했는지 연구해야 한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전직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egija@donga.com·이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