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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신체 감옥’에 갇힌 채 기억으로 복원한 삶

입력 | 2015-01-17 03:00:00

◇기억의 집/토니 주트 지음/배현 옮김/240쪽·1만3000원/열린책들




토니 주트는 “기차는 곧 천국”이라고 할 정도로 기차를 사랑했다. “루게릭병을 얻은 후 나를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사실은 아마도 내가 다시는 열차를 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리라. 나는 이 상황이 매일매일 진행되는 실제 병세보다 훨씬 우울하다. 이런 깨달음이 무거운 담요처럼 한없이 나를 짓누른다.” ⓒTim Thompson/Corbis

가석방 없이 진행되는 감금’인 루게릭병 앞에서도 토니 주트는 ‘단어와 개념의 전달자’로 남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남긴 불굴의 기록은 비범하면서 유쾌하다.

1948년 영국 런던 출신 유대인인 저자는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 ‘포스트워 1945∼2005’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한창 주가를 높이던 2008년 예순 나이에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인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정신은 또렷한데 사지는 점차 마비되는 진행 과정을 “한 주가 지날 때마다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이라고 묘사했다.

홀로 남겨진 밤은 가혹했다. 간호사는 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려운 곳을 샅샅이 긁어주고 옆을 떠났다. 그러면 “현대판 미라처럼 온몸을 동여매고 근시 상태로 아무 움직임 없이 홀로 신체의 감옥에 갇힌 채 오로지 나의 생각을 동반자 삼아 나머지 밤 시간을 보낸다.” 처음엔 불빛과 말벗, 성교가 절박했지만 점점 육신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삶의 기억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가족과 겨울 휴가를 보낸 스위스 체지에르 마을의 가족호텔 ‘샬레’였다. 과거 기억술사들이 머릿속에 가상의 기억 공간을 짓고 그 안에 기억을 축조하듯, 그도 기억 속 샬레의 안락한 공간으로 돌아가 밤새도록 ‘글을 썼다’. 아침이 오면 조력자에게 그 문장을 받아 적도록 했다. 사후에 출간된 이 책에는 그가 생생히 복원한 삶과 경험으로 깨달은 지혜와 성찰이 담겨 있다.

1948년생인 토니 주트는 2010년 8월 루게릭병으 로 타계했다. 열린책들 제공

저자는 신통하게도 코흘리개였을 1950년대 배급제 상황의 런던을 기억해낸다. 그는 “‘함께함’이 전후 영국을 특징지은 물자 부족과 암울함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며 “사람들은 무난한 색을 입고 서로 대단히 비슷한 삶을 영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풍족한 시대에서 금욕적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는 공익을 끝없는 상거래에 양보했고 지도자들이 더 높은 포부를 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대통령은 9·11사태의 여파 속에서 우리에게 쇼핑을 계속하도록 요구하는 말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소비를 통한 ‘함께함’ 이상을 통치자에게 요구하고 우리는 이기심을 줄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옥스퍼드대 교수 시절 ‘중년의 위기’를 극복한 저자의 자기자랑도 재밌다. 그는 중년의 사내들이 아내, 차, 심지어 성(性)을 바꿀 때 체코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체코어를 배우다 보니 체코슬로바키아에 끌리고 동유럽사에 눈뜨고 그러면서 동·서유럽을 통합하는 ‘포스트워’를 쓰게 됐다는 이야기다.

책을 덮고 일기장을 꺼냈다. 드문드문 쓰던 일기를 올해 매일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아래의 문장을 읽으니 더 공고해진다. “이왕 고통을 겪을 바에는 머릿속이 충만한 편이 좋다. 재활용 가능하고 다목적 이용이 가능한 기억들, 분석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당장 이용할 수 있는 기억들을 가지는 편이 좋다.” 저자 같은 탁월한 지능이 없으니 부지런히 써두자.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